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마음이 시큰했다. 그림책 속 시간 배경은 남아선호 사상이 지금보다 강했던 시절, 아들을 낳기 바라는 마음에 여자임에도 이름에 사내 ‘남’ 자가 들어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언니는 자라고 자라 공부 잘하고 예쁜 아이가 되었고,
남동생은 자라고 자라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가 되었어요.
나는 자라고 자라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아이가 되었고요.
마음대로 사는 아이니까, 참 걱정된다고요?
걱정 마세요.
내 마음은 그리 고약한 녀석이 아니니까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누리고, 책을 사랑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공하든 못하든 화가가 되고 싶다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성공하든 못하든 글을 쓰고 싶은 내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주인공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게 되어 예전과 같이 마음이 바라는 데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주인공은 결혼하고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었다.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리고 딸을 낳고 엄마가 되었다.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아기 돌보고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아기 돌보고”
남자 이름을 가진 여자로 태어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동생 학업을 뒷바라지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보다 남편을 내조하며 며느리로, 엄마로 40여 년의 시간을 살아온 윤석남 작가는 사회와 집단의 기대와 요구에 맞춰 페르소나에 갇혀 살았다.
작은 점이 되어 이대로 사라지고 말 것 같아.
이 문장에서 정말 많이 공감했다. 내가 먼지 같이 작게 느껴져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 버릴 것 만 같은 그 기분.
그런데 어느 날 마음이 속삭인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이 마음의 소리는 페르소나에 억눌린 그녀의 내면 속 자아의 소리이다. 이제는 그만 빛 가운데로 나오고 싶은 자아의 외침이다. 주인공은 드디어 마음을 따라가기로 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방으로 달려가 그림 도구를 사고, 화실로 달려가 그림을 배우고, 그림을 그렸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국 여성 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유명한 여성 운동가인 윤석남 작가라고 한다. 작가는 아버지가 일찍이 돌아가시고 가족의 생계를 돕다가 결혼 후 전업주부로 살았다. 그러다 마흔이 넘어서 화단에 화가로 데뷔했다. 윤석남 작가는 오랜 세월 불평 없이 자식을 위해, 식구를 위해 일하며 산 엄마를 그렸다고 한다. 엄마의 주름 진 살결 같은 나무에다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윤석남은 무엇보다 그림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보살피고 싶었습니다.
가난이나 폭력, 차별로 힘들데 살아가는 여자들을
때로는 가슴 아프게, 때로는 아름답게
그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첫째랑 같이 책을 읽고 나서 물었다. 지안이는 언제 행복해? 그랬더니 간식 먹을 때와 장난감 살 때가 행복하단다. 나 자신에게도 질문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하지?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느끼고 감사하는 나지만 나 스스로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면... 내가 나 다워질 때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를 나 답게 하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림, 글, 여행, 음악 ...
나를 나 답게 하는 일들에 주저하지 말아야지. 내 마음이 하는 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지. 그리고 나를 바로서게 해주던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힘이, 응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