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광부는 땅속, 깊게는 지하 천 미터에서 석탄을 캔다. 채굴된 석탄은 연탄이 되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아버지는 일터에서 차갑게 식은 석탄 묻은 검은 밥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랬고, 한겨울에도 40도가 넘는 찜통더위에 온몸이 땀범벅이 되도록 일하셨다. 그러나 당신만을 바라보는 가족들을 위해 매일 새카만 석탄을 캐러 그 어두운 땅속으로 들어가 힘겨운 노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한 가정을, 한 국가를 일으켜 세우며 막장에서 10년을 넘게 일하는 명품 노동을 하였고, 결국 산업재해로 돌아가셨다.
국어사전에서 ‘막장’은 “갱도의 막다른 곳”으로 풀이하고 있다. 광부가 일하던 막장이 드라마와 연결되면서 막장 드라마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의 황당한 설정들이 ‘막장’의 의미를 폄훼하고 있다.
2009년 대한석탄공사 사장은 “막장은 출구가 없는 끝이 아니라 국가가 발전하게 하려고 석탄을 캐는 일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곳, 누구의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최일선이며, 계속해서 전진해야 할 희망을 보여주는 숭고한 곳”이라고 하였다. ‘막장’은 더 이상 갈 곳 없는 낙오자의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의 시에서 연탄은 생명을 다하면서 희생정신, 인생의 숭고함 등을 표현했다. 이것은 ‘막장’ 같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막장’의 연탄은 ‘명품’처럼 희망이 있고, 따뜻함이 묻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요즘 드라마보다 더욱 극적인 내용이 날마다 전해진다. 공장에서 끼임 사고, 데이터센터 화재, 한일정상회담, 외교결례가 발생했다. 우리 삶에 광범위하게 자리하고 명품인 줄 알았던 대기업이나 정치인들은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막장에서의 나의 아버지처럼. 우리는 이들 사건에서 “실패로부터 배워야” 했다.
그러나 소란스럽다고 관심을 끊으면 안 된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주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갈등과 대결이, 토론과 논쟁이 기본이다. 그러나 건전한 토론, 대화와 타협이 아닌 일방적 지시 명령은 명품이 될 수 없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예전 실패로부터 배워서 명품의 나, 가정, 사회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스트레스 주는 것은 끝없는 막장이 아니다. 이겨내고 돌파해야 하는 막장이다. 막장은 희망이 없는 ‘갱도의 막다른 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과 따뜻함을 주는 '명품'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필자의 칼럼을 수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