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더하기 빼기
“ 너 오늘 참 예쁘다.”
“ 어쩜 그렇게 잘했어?”
대게 이런 칭찬을 들으면 으쓱하다기보다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아니라고 손사래가 먼저 쳐진다. 내심 나의 상태가 그들이 말하는 대로 멋지다고 해서 나 ‘예쁘다’ , ‘잘한다’ 고 맞장구치면 왠지
겸손하지 못하다고 생각될까 봐 뒤로 한 발짝 물러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머~ 너무 예쁘세요..”
“ 네~ 원래 전 예뻐요. 고마워요~”
'헉! 어떻게 저런 말이 서슴없이 나오지?'솔직히
예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착각은 자유라더니 진짜 자기 멋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시간여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 나 예쁘다.'의 의미가 결코 잘난 척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가장 핫한 키워드는 '비대면'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하는 일은 모두 금지가 되고, 그 자리에 온라인 만남, 강의 같은 것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발 빠른 사람들은 자기 하던 일을 온라인상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지금 자리를 잡지 않으면 영원히 이 바닥에는 발을 못 붙일 것처럼 모두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나만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이었다. 무엇을 하라는 것 인지는 알겠는데 가장 핵심인 그 '무엇'이 내게는 없는 것이다.
나를 알아야 했다. '나'는 없고 '나의 역할'만 남아버린 채 달려왔던 10년.
나를 파헤치는 글을 써 보기로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배움의 길을 선택했다. '나'라는 사람은 아무 목적이 없어도 관심이 가면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번 배움의 성격은 이전과 좀 다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정해놓고 달려든 배움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다면 배우는 게 지금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렁설렁 듣는 게 아니라 한번 들어서 모르겠다 싶으면 무한반복을 마다하고 수업에 참여했다. 한 달에 듣는 수업이 5~6개씩 되다 보니 거기에 따른 과제들을 해 내려면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 년 남짓한 시간을 보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일 년 동안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는 데 그런 나 자신한테 늘 야박하게 굴었다. 왜 할 줄 아는 게 없냐고, 그동안 뭐하고 살았냐며 나를 비난하고 헐뜯었다. 그래서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현실적 상황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때의 나와는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다. 더 이상 나를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비난이 아니라 사랑해 주기로 했다. 못한다고 구박하는 게 아니라 잘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기로 했다.
그날 강의를 하신 선생님의 "나 예뻐요."는 자기 암시였던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 스스로 나를 못난이라 여기면 그 누구도 내게 예쁘다고 할 사람이 없는 없다. .잘난 척이 아니라 내가 잘 살기 위해서 나에게 칭찬을 해 줘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열정적이다. 잘하는 것은 없지만 하겠다고 시작한 일은 끝까지 가지고 가는 저력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들의 말에 공감을 잘해 주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재능을 지녔다.
나는 겸손한 사람이다. 내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만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올리는 일에 진심을 다 한다.
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내가 다 품고 가리라는 마음가짐을 항상 잊지 않고 있다.
나를 대놓고 칭찬하려니 오글거림이 앞섰다. 그러나 쓰고 보니 내가 좀 근사하게 보인다.
올 한 해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내가 아닌 근사한 ‘나’로 거듭나고 싶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칭찬하는 일부터 소홀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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