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
이웃집 젊은이의 전사 통지가 오면 어머니는 내가 무사한 것을 기뻐했고, 이따금 일선의 친구에게서 군사 우편이 오기라도 하면 나 몰래 그것을 찢어버리곤 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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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어머니, 혹시 제가 지금 미친다면 대강 다음과 같은 원인들 때문일 테니 그 점에 유의하셔서 저를 치료해보십시오.
무진기행 p14~15 (더 클래식)
우리나라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보면 이런 내용들이 많다. 집안의 장남, 몇 대 손... 전쟁에 내보내지 않기 위해 집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 아들을 숨겨둔다. 그 안에 갇힌 청춘은 용감히 맞서지 못하고 엄마의 치마폭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을 한탄하며 괴로움에 젖는다. 말미에는 미치광이가 되거나 자살을 하거나 하는 스토리가 자주 등장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필사 중이다. 느리게 호흡하며 써 내려가는 중, 전쟁에 나간 친구들을 배신한 것처럼 혼자 다락방에 숨어 지내며 괴로워하고 있는 주인공을 마주했다. 어머니가 짜 놓은 시나리오 때문에 자신의 의지를 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정말 엄마 때문에 숨어 있어야 하는 걸까?' 엄마 때문이 아니라 본인이 용기가 없어 못 나가고 있는 건 아니었을지...
친구들보다 일찍 내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던 나는 20대 초반부터 큰돈을 만졌다. 철없던 어린 시절, 돈이란 있으면 쓰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나와 밤늦게까지 일하는 내게 보상이라며 여름휴가에는 꼭 비행기를 탔고, 유일하게 있는 취미라며 공연의 vip 좌석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결재했다. 그렇게 적당히 합리화된 금액들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무렵 나의 돈 주머니에서 또 하나 크게 구멍이 나는 부분은 100% 빚으로 시작한 사업장 대출금과 돈을 벌게 된 후 얼마 안 돼서 알게 된 아빠가 모르는 '엄마의 빚' 이 었다. 두 개의 빚을 매월 상환하고도 나의 사치스러운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금이 되었기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 건 유학을 생각했던… 일하기 시작한 지 4년쯤이 되었던 때 같다. 10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아이들과 복작거리고 있는 생활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좀 더 역량을 키우기 위해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뿌연 안갯속에 어른거렸다. 학원을 정리하면 대출금은 갚을 테고, 많지는 않지만 통장에 잔고가 조금 있으니 그걸 초기 자금 삼아 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떠나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건 엄마 때문이라고 여겼다. 아빠가 모르는 일, 엄마랑 둘 사이의 비밀, 내가 없으면 엄마는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큰 딸로서 모르면 몰랐을까 알게 된 상황이었고, 다행스럽게도 내게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량한 돈을 갚으며 가끔씩 으스대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실행하지 못하는 게 엄마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한테 그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언어도 불가능하고 실력도 턱 없이 부족해 갈 수 있을지, 아니 불합격 결과가 더 컸을 텐데 그것을 엄마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는 것은 한참 후에 깨달았다. 낯선 나라에 혼자 가서 있을 자신도 없었고, 운으로 어찌 갔다고 해도 그 뒤로 펼쳐질 고생들, 그리고 지금처럼 생활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 앞에서 용기를 내지 못했던 건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만일 그때 내가 생각으로 끝내지 않고 실천에 옮겼더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남들 앞에 나서는 끼가 부족하다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기에 감히 '피아니스트라'는 타이틀로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겠지만 어느 학교의 한자리에서 '교수님'이라는 칭호를 달고 있지 않을까 싶은 핑크빛 상상을 할 때도 있다.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깨달은 지금은 돈과 시간과 청춘을 다 받쳤는데 '시간강사' 자리도 제대로 구하지 못해 괜히 다녀왔다고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 지어본다.
뜻하지 않게 만난 책 속의 한 구절에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지난 옛 일이 떠올랐다. 큰 일을 결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세세한 그 모든 일은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어딘가 싶다. 서투르지만 하나씩 올바른 생각이 영글어 가고,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나의 부족함이 아니었는지 돌아볼 줄 아는 현명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오늘의 나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