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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탄 Sep 04. 2022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 욕망이 희망이 될 때

절대반지라는 욕망, 유대감이라는 연결고리

꿈 같은 시절


이전에 <놉>의 리뷰를 쓸 때도 말했듯이, 굳이 분석하고 비판할 필요 없이 순수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던 시절과 그 때의 영화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내게는 2000년대 초반이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그리움을 부르는 영화들에 대해 나지막히 생각해 보면, 단순히 어린 날의 추억이라는 점수를 더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의 내가 나이만 먹고 그 당시로 돌아가더라도 흠을 잡기 힘든 걸작들이 대부분 그 시절에 나왔기 때문이다.


2001년 겨울, 국내 서점과 극장가,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만 해도 책읽기에 서서히 관심이 멀어지려다, 영화판의 개봉이 머지않아 내용이라도 이해하려고 첫장을 넘기자마자 사흘 동안 2권 <비밀의 방>까지 단숨에 읽어내렸던 기억이 난다. 크리스마스 시즌,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가 상상했던 해리와 호그와트의 모습이 스크린 속에 완벽하게 살아나 있는 것을 보고 감탄을 거듭하면서 다음해에 2편이 나온다는 생각에 다시금 두근거렸다.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도 레고 호그와트 급행열차였고 말이다.


그런데 부모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주말에 다른 영화를 한 편 더 예매하셨다.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라는 듣도보도 못한 영화였다. 당시 들어보지도 못했던 제목인지라 내 반응은 조금 심드렁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이만큼 웃긴 일이 없다). 중세풍의 배경에 컴퓨터 게임에서 볼 법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 기대가 동하긴 했지만, '설마 해리 포터만큼 재밌겠어?' 라는 정도로 객석에 앉았으니 말이다. 부모님, 특히 아버지는 그런 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하셨다.


그리고 프로도와 샘이 모르도르로 향하는 엔딩 크레딧이 뜰 때쯤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내가 도대체 뭘 본 거지?'


이제는 중고서점에서만 볼 수 있는 황금가지 완역판


당시 엔딩 크레딧에 한글자막으로 '프로도의 모험은 계속됩니다' 비슷한 문구가 지나가고, 부모님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2편 내년에 나온대'라고 말하는 걸 듣자마자 난 말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도대체 앞으로 1년의 시간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부터, 저 절대반지라는 조그만 물건이 대체 얼마나 세길래(?) 다들 못 죽고 안달인지, 간달프는 정말 죽었는지, 저 골룸이란 기괴한 거미 같은 괴물딱지가 2편에도 나오는지 등등...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극장을 나서는 즉시 부모님을 졸라서 그 길로 서점에 가서 간달프의 표지가 그려진 황금가지 출판사의 6권짜리 완결판을 샀다. <해리 포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마어마한 텍스트에도 불구하고 3부작 전체를 읽어가는 동안 나는 문자 그대로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한 사람이, 그것도 50년 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의 세계와 이야기를 어떻게 창조할 수 있었단 말인가.


주말이 지나고 학교에 갔을 때는, 교실은 말 그대로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으로 파벌이 나뉘어져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당연히 <반지의 제왕> 파벌에 속했다. <마법사의 돌>이 환상적인 롤러코스터였다면, <반지 원정대>는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린 충격이었다. 호그와트가 현실의 틈새에서 구성된 꿈의 공간이었다면, 가운데땅은 이전의 어떤 영화나 소설에서도 본 적이 없던 장대한 세계였다. 이후 확장판 DVD를 구입해 <두 개의 탑>의 개봉 전까지 반복해서 보느라 나중에는 극장판에서 편집된 부분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나는 이 영화가 가져다준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다.


사상 최대의 모험


이렇다 보니 당연히 <반지의 제왕> 3부작 이후에도 그와 엇비슷한 충격과 감동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내가 영화를 수천 편이나 보게 된 것도, 대학 전공으로 영문학과와 문예창작학과를 선택하여 작가의 꿈을 키우게 된 것도, 졸업 후 많은 일을 오가다 영상번역가로 활동하게 된 것도 결국 다 이 영화 덕이다(사실 이 3부작의 국내 번역자막은 상상초월 수준의 오역들로 넘쳐나기에 이걸 바로잡는 데서 내 영상번역 경험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후속작인 <호빗> 3부작이 나왔다 해도, 아마존 프라임의 드라마 <힘의 반지>가 성공한다 해도 이 확신은 깨지기 힘들 거 같다(<힘의 반지>의 초반부에 대한 내 생각은 너무나 복잡미묘하기에 굳이 따로 언급하진 않겠지만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어째서 완벽한 영화인가'라는 질문은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저 '말이 필요 없다'고 치켜세우기만 할 뿐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는 않았다. 개봉한 지 20년은 늦은 리뷰이니 만큼, 이미 수많은 팬들이 영화와 소설의 비교 분석을 해준 대신 나는 최대한 연출적인 면, 그리고 그것이 내게 준 느낌에 집중해 보려 한다.


원작을 최고로 여기는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의외로 이 작품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프로도와 호빗들의 모험이 점차 방대한 등장인물들간의 전쟁 서사시로 발전하는 동안, 원작을 압축한 결과 단순히 전쟁 스펙터클만을 강조한 액션 블록버스터로 전락했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다. 물론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애초에 소설의 영상화라는 건 원작의 정서와 세계관에 대한 고증을 100퍼센트 지키면서 진행할 수가 없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당장 원작부터 단어만 57만 개가 넘어가는 대서사시인데, 이걸 그대로 만들어내려면 영화가 아닌 시즌제 드라마의 분량이 필요하다. 하지만 스케일 역시 결코 당대 드라마가 담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열렬한 톨키니스트였던 피터 잭슨도 이러한 한계를 감안하고 내용을 최대한 축약해 2부작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다 뉴라인 시네마 간부의 호쾌한 3부작 컨펌을 통해 있는 힘껏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톨키니스트로서의 무한한 팬심을 걷어내고 봐도, 이 3부작은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부분이 단 한 컷도 없다. 제작 과정에서의 비하인드 스토리만 따져도 새로운 시도가 많았던 만큼 영화 못지않게 극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제작부터 개봉까지 모두가 사상 최대의 모험이었던 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 하나는 피터 잭슨 감독이 이 작품을 단순히 판타지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영국의 신화'를 만들고자 했던 톨킨의 의도를 정확히 캐치하고 있었고, 때문에 기존의 아이들용 판타지 영화보다 성인층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초대형 사극, 시대극의 느낌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수반되는 온갖 소품과 의상, 건축, 로케이션, CG, 배우 계약과 천문학적으로 불어날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3부작 전체를 한 번에 찍는 전례가 없는 스케줄을 감행했다. 감독과 제작진은 작품에 대한 덕력과 성심을 다해 100퍼센트의 고증에 최대한 도달하면서 고유의 영상미를 살리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큰 설정오류 없이 작품의 정서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었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완결편인 <왕의 귀환>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나도 거기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3부작 중 최애작을 고르라면 나는 첫 작품인 <반지 원정대>를 꼽는다. 영화 인생 최초의 충격을 안겨준 것을 제하고도 3부작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중 하나인 '욕망에 대한 경고'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한 초반의 고즈넉하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모험을 거치며 점차 절망적으로 바뀌어간다는 점에서 스토리의 흐름이 가장 역동적이다. 장대한 풍광을 직접 밟으며 미지의 영역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모험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면서, 평화를 누리며 살던 호빗들이 거대한 악의 실체를 마주하는 데서 오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훌륭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말하는 대신 보여주기


소설의 영상화에는 어쩔 수 없이 축약과 재구성이 들어간다. 아무리 쳐내고 쳐내더라도 가운데땅이라는 방대하고 이질적인 세계를 관객에게 처음 선보이기 위해서는 대사를 통한 설명이 필요하다. 원작 소설은 <호빗>의 후속작이라는 점을 설명하며 마술 반지에 대한 언급만 짧게 하고 곧바로 호빗들의 이야기로 넘어가지만, 영화가 그것을 쫓아갔다간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는 콘텍스트가 지나치게 부족해진다. 그렇다고 설명과 동시에 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만드는 것은 탄탄한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 해도 상당히 어렵다. 그 점에서 갈라드리엘(케이트 블란쳇 扮)의 목소리를 통해 소개되는 반지들의 탄생은 영화적으로도 아주 탁월한 시작이다. 핵심에 집중하고, 배경이 되는 세계는 그 핵심을 뒷받침하는 소재로 간략하고 임팩트 있게 소개해 내기 때문이다.


갈라드리엘은 요정, 난쟁이, 인간의 역사나 이들이 사는 가운데땅의 방대함에 대해 구구절절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영화는 오로지 가장 중요한 매개체인 힘의 반지와 그 소유자들, 그리고 그들을 모두 지배할 절대반지의 탄생 비화에 주력한다. 이 반지 하나로 인해 벌어진 최후의 동맹 전투의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반지를 낚아챈 이들의 타락까지 비추면서, 배경을 하나도 모르는 관객들에게도 반지가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가를 단숨에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 이후의 설명이라 해 봤자 빌보 배긴스(이안 홈 扮)를 통해 작품의 핵심이 되는 호빗들의 생활상에 대한 언급이 전부다.



즉 <반지 원정대>는 구태여 말하지 않고 직접 보여주는, 시네마의 본질을 꿰뚫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방대한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샤이어 바깥의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공 프로도(일라이저 우드 扮)를 비롯한 호빗들의 관점에 관객의 시점을 포개어 진행된다. 거대한 세계에 대한 궁금증에 대해서는 간달프(이안 맥켈런 扮)와 아라고른(비고 모텐슨 扮)처럼 관록 넘치는 동료들이 가이드가 되어 일부를 짤막하고 은유 가득한 명대사들로 해갈해 줄 뿐 자랑하듯 장광설을 내뱉지 않는다. 나머지는 프로도와 관객들의 상상에 맡기며, 오직 절대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본연의 여정에 집중한다.


다양한 캐릭터 구성도 영화의 인기에 크게 한몫했는데, 인물의 개성을 살린 배우들의 호연뿐만 아니라 역시 그것을 영상에 구현하는 방식에서도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관적이다. 캐릭터에 대해서도 영화는 보여주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인물은 대사뿐만 아니라 손동작과 눈빛, 표정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영문학의 금자탑인 원작 소설의 모든 대사들을 가져오지 않고 더러는 상황에 맞게 창작하는 것은 원작팬들을 향한 일종의 모험이다. 하지만 간달프와 엘론드(휴고 위빙 扮), 갈라드리엘처럼 초월적인 존재들조차 시적인 대사들을 늘어놓기보다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실존적 고민에서 나오는 대사들로 현장성을 높였다.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와 직관적인 연출을 택함으로서 영화 속 여정의 지루함과 거리감은 훨씬 줄어들게 되고, 발화되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 잠재된 수수께끼는 더 이상 단점이 아니라 신비로운 톤 앤 매너의 일부로 작용한다. 인물들의 발걸음이 웅장한 풍광과 일자로 맞물리면서 가공의 세계에 관객들이 호빗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듯한 핍진성과 몰입도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아름다우면서 장대한 미지의 배경 사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는 세계를 향해.


욕망의 그림자와 공포


톨킨은 어떠한 주제의식과 메시지를 주고자 <반지의 제왕>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초창기에 소설을 집필했던 목적은 <호빗>의 후속편이자 그가 창조한 거대한 가공의 신화<실마릴리온>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내용을 쓰기 위해서였다. 다만 이후에 그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 S. 루이스와의 편지에서 '굳이 주제를 정한다면 욕심 없는 삶의 소중함이 될 거 같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러한 주제를 영상으로 역설하기 위해서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악과 그로 인한 부작용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반지의 제왕>은 그 욕망의 부산물을 웬만한 호러 영화 저리가라 할 수준으로 무시무시하게 표현해 냄으로써 다른 판타지 영화들의 실수를 피해 간다. <반지 원정대>는 기본적으로 하이 판타지 어드벤처 콘셉트의 영화임에도, 환상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절제하며 폐허와 자연경관을 통해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B급 취향의 호러 영화를 만들며 인간의 심리를 건드려온 피터 잭슨의 경험과 호러 DNA가 자연스레 그의 라이프워크 속에도 깃든 것이라고 봐야 한다(호러영화 전문 감독이 블록버스터도 잘 찍는다는 건 이쯤 되면 하나의 방정식이라고 봐도 될 법하다).



이것이 가능했던 데는 무엇보다도 사운드트랙의 공이 크다. 영화의 음악감독 하워드 쇼어는 원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나 데이비드 핀처 같은 호러 스릴러 거장의 음악을 전담해오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하워드 쇼어는 <반지의 제왕>에 많은 영향을 끼친 <니벨룽겐의 노래>의 거장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은 작곡가이기도 하다. 저예산 호러 연출가와 스릴러 음악가의 조합은 결과적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훨씬 어둡고 깊이 있게 만들었다.


하워드 쇼어는 바그너의 음악기법 중 짧은 주제선율을 가지고 갖가지 방식으로 변주하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f)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짧은 순간에도 음악을 암시와 복선으로 조직화한 결과 관객은 OST만 들어도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반지와 사우론, 나즈굴과 사루만 등 악역의 존재를 묘사할 땐 톨킨이 만든 요정 언어인 퀘냐어로 구성된 가사에 소프라노, 테너 등 높은 음이 들어간 코러스를 십분 활용한다. 절대악의 영향력과 공포를 이보다 생생하게 들려줬던 영화음악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이 또한 주인공의 모험만 부각시키다 위기감 조성에 실패한 다른 판타지 영화와의 차이점이다.



한편 화면상으로도 3부작 중에서 가장 명암과 채도의 콘트라스트를 두드러지게 하여 그림자를 통한 공포감의 조성에 공을 들인 작품이 바로 <반지 원정대>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존재는 전반부에서 호빗들을 시시각각 위협하는 그림자 악령 나즈굴이다. 사우론의 수족이자 타락한 인간의 왕인 흑기사들은 음산한 코러스와 함께 호빗들의 자취를 뒤쫓으며 온 땅을 쥐 잡듯이 헤집어놓는다. 심지어 나즈굴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도 영상은 자연광을 통한 그림자와 야간장면을 십분 활용하면서 매 장면에 악의 기운을 암시한다. 특히 특유의 쇳소리 가득한 비명은 단순 인격체가 아닌 악령, 호러 크리처로서의 양식이 제대로 묘사된 예다.


욕망으로 말미암은 어둠은 영화 내의 다채로운 공간 속에도 깊이를 더하고 있다. 백색의 마법사 사루만의 영지인 아이센가드 또한 사우론과 손을 잡은 이후 빛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악마 발로그가 잠들어 있는 모리아의 암흑 또한 미스릴을 위해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려던 난쟁이들의 욕심이 부른 비극이었으며, 어둠 속에서 원정대를 쫓아오는 골룸(앤디 서키스 扮) 또한 반지에 대한 갈증으로 핏발 선 눈동자가 불길하기 그지없다. 로스로리엔의 아름다운 전경에서 휴식을 취할 때도 밤 시간대를 통해 간달프를 잃은 우울함이 표현되며, 반지를 넘겨주겠다는 프로도의 말에 순간적으로 야망을 드러내는 갈라드리엘의 모습 또한 암흑과 빛의 극단적인 대조로 가득 차 있다.



반면 이 모든 위협의 근원인 절대반지와 암흑의 군주 사우론의 형체는 아이러니하게도 완전성을 상징하는 둥근 황금빛의 반지, 그리고 가장 밝고 거대한 불꽃의 눈 형상이다. 비록 원작에서도 사우론의 시선에 대한 묘사가 많지만 눈 형상은 의외로 영화만의 각색이다. 사우론, 나아가 그의 상관이자 진정한 절대악인 모르고스의 모티브가 그 누구보다 빛을 손에 쥐기를 갈망하여 창조주에 반기를 든 기독교의 루시퍼라는 점을 보면, 주변의 모든 것을 무로 돌려버리는 불길과 그 한가운데의 째진 동공은 마치 그 자신이 새로운 절대자임을 과시하는 듯하다. 악의 존재를 이보다 단순하면서도 관념적으로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사우론의 눈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히 '악한 자의 욕망'이 아닌 '평범한 자를 악으로 물들이는 욕망'이다. 반지의 소유자인 프로도와 빌보를 비출 때도 얼굴의 양면에 극단적인 명암비를 주어 인물에 내재된 어둠들을 암시하고 있다. 간달프의 경고처럼 원정대 내에서도 보로미르(숀 빈 扮)라는 캐릭터를 통해 욕망의 그림자가 찾아든다. 프로도에게 있어 보로미르는 전반부의 나즈굴 못지않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같은 인간인데도 프로도를 물심양면으로 지키려는 아라고른의 완벽함과 대비되어 수시로 반지를 탐내는 보로미르의 인격적 단점은 관객에게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된다.



그런데 사실 보로미르야말로 <반지 원정대>의 후반을 장식하며 공상으로 가득한 이 작품을 시네마의 정상에 올려 놓은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현명한 마법사도, 낙천적인 호빗도, 고매한 요정도, 우직한 난쟁이도 아닌 평범한 인간이라는 종족적 한계에 놓여 있다. 조국에 대한 자긍심 높은 용사이지만 왕이 될 운명을 갖고 태어난 아라고른의 옆이라면 보로미르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일반인에 가깝다. 중후한 외모와는 달리 그의 심상과 목소리는 상처로 가득하다. 섭정인 아버지와 민족을 위해 대장으로서 전장에 나가 싸웠지만 나날이 커지는 모르도르의 힘 앞에서 백성과 도시를 잃어가며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에게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반지는 포기하기 어려운 신물이다.


한편으로 그는 이 작품에서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눈폭풍이 몰아치는 카라드라스를 넘는 동안 호빗들의 안전을 우선하며, 간달프의 추락에 아랑곳않고 발길을 재촉하려는 아라고른에게 '애도할 순간은 줘야 할 거 아닌가!'라고 울부짖듯이 외친다. 이후 로스로리엔에서 마음의 짐을 털어놓는 아라고른과의 대화는 그러한 인간미의 절정이다. 내면을 꿰뚫린 듯한 허망함과 민족에 대한 자부심, 혼자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절망감과 왕의 귀환을 향한 한 줄기 희망까지. 보로미르는 프로도를 제외하면 이 작품에서 가장 다채로운, 그러면서 현실적인 감정선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순간에 반지의 유혹에 넘어가 프로도를 건드리는 실수를 범하지만, 이를 깨닫고 바로잡기 위해 다른 호빗들을 지키려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뼛속까지 곤도르의 군인이었던 그가 원정대의 소속원으로서 맞이하는 죽음은 애틋하기까지 하다.


원작 소설에서 보로미르의 죽음은 두 개의 탑 초반에 묘사된다. 그의 희생을 굳이 영화판 1편의 결말로 끌어온 이유는, 왕의 운명을 거부하던 아라고른의 결심을 세워주며 작품의 전환점을 제시한다는 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다. 범인으로서의 인물을 통해 욕망에 대한 경고를 함과 동시에, 그것을 권력이 아닌 서로간의 믿음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동시에 보여주고자 한 감독의 의도가 훌륭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함께라는 희망


영화가 아닌 현실로 돌아오면, 욕심 없는 삶이란 것은 결국 욕심에 굴복하지 않는 삶이라는 점에서 성취하기 불가능하다. 사람은 욕망하는 동물이고, 세상은 욕망으로 움직인다. 사회악으로 취급받는 범죄 또한 대개는 욕망의 불만족에서 비롯된다. 주어진 일이 있음에도 내려놓고 싶은 마음, 돌려놓을 수 없음에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 남의 것임에도 빼앗고 싶은 마음 모두가 스스로의 미련을 채워넣고 안온해지기 위한 그릇된 욕심에 속한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원정대는 붕괴되고, 혼자 남은 프로도는 앞으로의 여정을 망설이며 사람들의 희생을 초래한 반지 운반자로서의 자신의 운명을 책망한다. 그때 간달프가 남겼던 말이 다시금 프로도의 정신을 일깨운다.


살다 보면 누구나 뜻밖의 일들을 겪지만 그것은 우리 결정 밖의 문제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지.


3부작의 주제를 압축한 이 대사는 세상의 모든 영화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대사이기도 하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미련을 남기기보다, 지금 현재에 닥친 문제를 딛고 계속 나아가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바라던 삶의 성취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아니라 나아가는 곳에 있으므로.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운명에 대한 순응이 반강제되어 가는 세상에서 갈수록 성취하기 어려운 금언이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욕망 속에서도,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부끄러움과 후회가 없다면 그 욕망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 희망을 달성하기 힘들다. 골룸이 반지의 욕망에 굴복하여 이중인격의 괴물이 된 것은 반지의 유혹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이 5백 년 동안 고독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나섰더라면 필경 같은 운명이 되었을 프로도는, 그를 끝까지 따라나선 샘(숀 애스틴 扮)이 있었기에 여정을 무사히 계속할 수 있었다. 프로도가 반지 운반자였다면, 샘은 희망을 운반하는 사람이었다. 반지에 대한 욕심 없이 오로지 간달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함께 갈 것이라는 샘의 마음가짐 밑에는 임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소박한 희망이 깔려 있다. 두 호빗의 포옹에서 흐르는 샤이어의 테마가 가슴을 울리는 것은 서로의 욕망을 희망으로 완성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친구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아라고른을 비롯한 세 명의 추격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원정대의 분열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프로도가 길을 헤쳐 나가기를 희망하며 다른 호빗들을 찾아나서려 추적한다. 아라고른이 반지의 유혹을 거부하고 프로도와 샘에게 잠시의 이별을 건네는 장면은 영화판만의 각색이다. 원작처럼 예상 못한 갈라짐이 아니라는 점에서, 영화는 아라고른과 프로도 두 사람이 일부러 다른 길을 택함으로서 양측이 오히려 서로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작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 유대감(Fellowship)이 절박한 세계 앞에서 희망을 간직하며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I don't suppose we'll ever see them again." / "We may yet, Mr. Frodo. We may."


그렇게 각자의 여정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축복하듯이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모든 이야기의 완결 못지않은 거대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연속성이 훌륭하게 표현된 엔딩이기 때문이다. 완결편인 <왕의 귀환>에서의 간달프의 말처럼, 죽기 직전까지는, 아니 어쩌면 죽음 이후에도 완전히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 여정은 없다. 언제나 다음 여정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곁을 걸으며 진심으로 서로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여정은 고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특히 여정의 끝에서 맞이할 시원섭섭함 대신, 해야 할 일을 계속하고자 하는 이 결말의 정신은 볼 때마다 묘한 고양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왕의 귀환>에서 고향 샤이어에 돌아오는 것보다, 때이른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여정을 계속해가려는 <반지 원정대>의 결말을 더 좋아하나 보다. 작품 자체의 재미나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세계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침울하고 힘겹고 두려운 순간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어렵게 걸으려는 그 한 걸음이 언제나 다시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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