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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추억은 아닌데?

건축학개론

by 이주희 Jan 29. 2025

주말 아침, 오랜만에 늘어지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이불과 한 몸이 되어 자리를 뭉개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화를 한 편 보고 싶어졌다.

로맨틱 코미디가 딱 좋을 것 같았는데 그래서, 건축학개론을 재생했다.


건축학개론이 개봉하던 당시에 이 영화를 보고 많은 남자가 첫사랑을 떠올렸다고 했다.

각종 포털엔 지난 추억을 소환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가 마구 쏟아졌었다.

뭐, 나는 비슷한 추억이 없어서 공감하긴 어려웠다.

그렇지만 막 스무 살이 된 어설픈 남자의 심리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어리석은 시절을 겪어야 어른이 되는 법이고 병신 같은 시기를 지나야 삶의 숙련도가 깊어지는 게 인생의 진리 아니던가.

언젠가 아내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어릴 때 남자들이 눈치가 없지. 뭐, 다 커서도 없지만.


눈치 없는 새끼ㅋㅋ눈치 없는 새끼ㅋㅋ

왜, 우리가 눈치 없다는 소릴 들어야 하지?

솔직히, 영화 속 승민의 모습은 내가 봐도 답답하다.

서연이 승민을 향해 신호를 보내지만 그걸 제대로 잡아내질 못한다.

특히, 서연이 이사한 자취방에 승민을 처음 데리고 간 일이나 정류장에서 승민이 몰래 뽀뽀를 할 때 모른 척 받아준 일은 뇌에 주름이 없더라도 그린 라이트라고 느껴야 정상이다. 그러나 CC가 되는 하이패스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빠르게 행동하지 못하고 납득이와 싱숭이 생숭이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어떡하지, 너?


그렇지만, 승민이는 스무 살이라고!

서연이가 재욱 선배를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하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의 처지가 신경 쓰여 고민이 깊어지는 것이다.

상황 판단이나 우선순위에 올려야 할 사안을 정할 능력이 아직은 부족할 때이니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스무 살엔 띨띨하게 행동할 수도 있는 거다.

너는 뭐 달랐을 거 같냐?

게다가 둘이 서연의 자취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으니 승민의 입장에선 모든 게 끝났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다.

어? 어? 어휴 이 병신어? 어? 어휴 이 병신

“ㅋㅋ저 병신”이라는 조소는 역시 쪼다였던 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생각이 짧았다기보다는 겁이 많았다고 해야 정확하겠지.

이래도 되는지 저래도 되는지 눈치를 실컷 보다 놓치고 잃은 것들이 한 트럭이다.

겨우 서른이 됐을 때에야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분리하는 방식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10년이라는 세월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시간이 참 소중하다.

젊을 때나 낭비하며 후회하는 거 아니겠어?

그 시절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반면교사로 삼아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었다.


승민도 마찬가지다.

격한 감정에 빠져 꺼지라고 말하는 치기에서 벗어나 궁금한 걸 물어보는 사람이 되었다.

궁금한 게 있다면, 둘의 사이가 뭔지 알고 싶다면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시나리오 쓰고 드라마 찍을 필요가 전혀 없다.

뇌내 망상은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둘이 자취방에 함께 들어가는 모습을 본 것만큼은 상상 극장을 상영해도 인정해 주자.

그걸 어떻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어?

나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니! 그걸 믿냐?나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니! 그걸 믿냐?


내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광고를 믿다니.

'쌍년'도 되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일 텐데 이것도 과거가 미화된 탓이지 않을까?

원래 추억 속 창밖엔 서글픈 비가 내려오는 법이고 별거 아닌 트로피가 영광의 장면으로 재해석되기 일쑤니까.

뭐, 내가 20대에 아름다운 추억 하나 없어서 심술을 부리는 건 절대 아니다.

찾아보기 귀찮을 뿐이지 뭔가 있긴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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