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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Apr 09. 2023

옛 동네에 맺힌 기억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려고 해

엄마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옛 동네가 가까워질수록 불안했던 것은 단지 엄마와 다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유난히 몸의 저릿함이 강했다. 왜일까, 버스에 앉아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나는 마침내 희미하게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옛 동네로 향하는 길은 상처가 가득한 과거로 회귀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옛 동네로 향하는 길은 상처가 가득한 과거로 회귀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독립하기 전까지 나는 평생을 한 동네에서 지냈다. 그것은 모든 성장과 실패와 기억의 순간들이 한 자리에 머물러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집에서 단 5분 거리에 놓인 곳이었고, 중학교는 차로 10분, 고등학교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의 모든 세계는 집을 중심으로 반경 5km를 넘지 않았다. 5km 내에 지어진 우물 하나로 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머물러 있다는 것은 흐르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나는 그동안 한 곳에 고인 채 살아왔던 것 같다. 특히나 초등학교 때 겪었던 따돌림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몸부림쳤다. 학교 근처에 있던 놀이터와 거리 곳곳에 적힌 이름 석 자, 그리고 그 옆에 함께 적혀있던 아픈 욕이 나를 조아 맸다.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한순간에 나를 무시하고 투명인간 취급을 할 때도 그랬다. 작은 심장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혈관이 조이는 느낌. 몸 전체가 일시정지한 듯 차가워지는 느낌. 여리고 예민한 열두 살짜리 아이가 감당하고 겪어내기엔 온 세상이 무너지는듯한 일이었다.

 이후 수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름과 욕이 적혀있던 자리가 희미해졌다. 기억으로부터 희미해졌다기보다는  놀이터가 있던 아파트가 새로 페인트칠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안도의 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전에는  주변을 걷는 것도 긴장되는 일이어서 마주치지 않으려 돌아서 길을 가곤 했다.




20 중반을 지나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동네에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기억이 고여있는  동네로부터  1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새로 이사 와서 한창 지낼 때는  몰랐는데, 다시  동네로 돌아가보니 내가 그간 우물  개구리로 살았다는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겪었던 크고 작은  좋은 기억들은 오직  공간에 머물러있을 뿐이었다. 오랜 기간 상처로 남겨뒀던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20 이상 머물렀던 동네  자체였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세상이 단지 '사건의 총체'라고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는 지역적이다."


 나는 왠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만일 현재가 정말 지역적이라면, 나의 오래 묵은 기억들도 지역과 공간의 변화로 인해 흐려질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분이 오묘해졌다. 세상이 과거-현재-미래가 아닌 사건의 총체로 존재한다니.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을 끌어안고 아파했던 순간들에는 공간의 영향이 있었다니.  동네를 마주하며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나는 정말 완벽하게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향이 그래도 좋지 않느냐고 말을 건네는 엄마의 목소리가 아쉬운 듯 떨렸다.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한 번은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옛날에 엄마가 살던 곳에 한 번 가보고 싶지는 않아?" 엄마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나는 분명히 엄마의 질린 표정을 기억한다. 나도 그것과 비슷한 느낌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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