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려고 해
엄마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옛 동네가 가까워질수록 불안했던 것은 단지 엄마와 다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유난히 몸의 저릿함이 강했다. 왜일까, 버스에 앉아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나는 마침내 희미하게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옛 동네로 향하는 길은 상처가 가득한 과거로 회귀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독립하기 전까지 나는 평생을 한 동네에서 지냈다. 그것은 모든 성장과 실패와 기억의 순간들이 한 자리에 머물러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집에서 단 5분 거리에 놓인 곳이었고, 중학교는 차로 10분, 고등학교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의 모든 세계는 집을 중심으로 반경 5km를 넘지 않았다. 5km 내에 지어진 우물 하나로 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머물러 있다는 것은 흐르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나는 그동안 한 곳에 고인 채 살아왔던 것 같다. 특히나 초등학교 때 겪었던 따돌림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몸부림쳤다. 학교 근처에 있던 놀이터와 거리 곳곳에 적힌 이름 석 자, 그리고 그 옆에 함께 적혀있던 아픈 욕이 나를 조아 맸다. 가장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한순간에 나를 무시하고 투명인간 취급을 할 때도 그랬다. 작은 심장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혈관이 조이는 느낌. 몸 전체가 일시정지한 듯 차가워지는 느낌. 여리고 예민한 열두 살짜리 아이가 감당하고 겪어내기엔 온 세상이 무너지는듯한 일이었다.
이후 수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이름과 욕이 적혀있던 자리가 희미해졌다. 기억으로부터 희미해졌다기보다는 그 놀이터가 있던 아파트가 새로 페인트칠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안도의 순간을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전에는 그 주변을 걷는 것도 긴장되는 일이어서 마주치지 않으려 돌아서 길을 가곤 했다.
20대 중반을 지나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동네에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기억이 고여있는 옛 동네로부터 약 1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새로 이사 와서 한창 지낼 때는 잘 몰랐는데, 다시 옛 동네로 돌아가보니 내가 그간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겪었던 크고 작은 안 좋은 기억들은 오직 그 공간에 머물러있을 뿐이었다. 오랜 기간 상처로 남겨뒀던 건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오히려 20년 이상 머물렀던 동네 그 자체였던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세상이 단지 '사건의 총체'라고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책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는 지역적이다."
나는 왠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만일 현재가 정말 지역적이라면, 나의 오래 묵은 기억들도 지역과 공간의 변화로 인해 흐려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분이 오묘해졌다. 세상이 과거-현재-미래가 아닌 사건의 총체로 존재한다니.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을 끌어안고 아파했던 순간들에는 공간의 영향이 있었다니. 옛 동네를 마주하며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나는 정말 완벽하게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향이 그래도 좋지 않느냐고 말을 건네는 엄마의 목소리가 아쉬운 듯 떨렸다. 글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한 번은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옛날에 엄마가 살던 곳에 한 번 가보고 싶지는 않아?" 엄마는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나는 분명히 엄마의 질린 표정을 기억한다. 나도 그것과 비슷한 느낌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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