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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나무 Jan 11. 2022

유년의 기억 1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우리 가족이 영주 주택에서 살던 시절, 동생이 태어나던 날에 있었던 몇 개의 장면이다.     

대청마루에서 안방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나오시더니 ‘엄마가 아기를 낳고 있으니 안방엔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 오빠들(우리 친오빠, 외사촌 오빠와 사촌 오빠)과 언니가 나를 데리고 오빠들 방으로 가서 창틀에 올려주었다. 그 방은 창문이 벽 선보다 좀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서 뭔가를 올려놓기 좋은 공간이 있었다. 오빠들이 날 재미있게 했었는지 마구 깔깔거리며 웃었던 생각이 난다. 그때 나는 네 살이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난 집이 어디였는지는 모르겠다. 겨우 걸음마를 떼는 정도일 때 영주 주택 뒷마당에서 엄마에게 안겨 언니와 찍은 사진이 있는 걸 보면 그 집에서 아기 때부터 살았던 거 같다. 우리 집은 지붕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쭉 늘어져 있는 동네의 가장 앞에 있었다. 앞마당 담장 너머는 넓은 공터였다. 옆집과 붙은 담장엔 양쪽 집만 드나드는 쪽문 같은 것도 있었다. 대문 밖 골목으로 나가면 반대편에도 집들이 여러 채 있었다.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동료들도 같은 동네에 여럿 있었던 거 같다.     

우리 집엔 돌로 된 욕조에 선반처럼 걸쳐진 나무의자가 있는 목욕탕이 부엌 뒤쪽 어딘가에 따로 있었다. 장작불을 때서 물을 데우는 형식이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건 모르겠다. 엄마랑 언니와 목욕했던 장면이 어렴풋하다. 또 기억나는 장면 중 하나는 내가 동생을 업고 옆집으로 난 쪽문을 넘어가는 모습이다. 엄마는 대청 마루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마도 나는 엄마에게 동생을 업어보고 싶다고 졸랐을 거 같다. 엄마는 기다란 기저귀로 아기를 내 등에 착 달라붙게 잘 감싸서 업혀줬고 나는 옆집에 내가 아기를 업을 수 있다는 걸 자랑하려고 했던 거 같다.   

  

친척 오빠들까지 함께 살다 보니 우리  엄마는 대청마루보다 한 단 아래에 있는 부엌에서 도시락을 여러 개 싸곤 했다. 오빠들은 늘 서로 장난치며 재미있게 노는 거 같았고, 어떤 날은 다투기도 했다. 언니는 아침마다 학교 가는데 개가 쫓아온다고 담장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내 기억 속 우리 개는 말처럼 크게 느껴진다. 내가 개의 등위에 올라타기도 했으니까.

그 개가 강아지였을 때 홍수가 나서 잃어버렸는데, 한참 후에 동네 골목에서 헤매고 있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던 오빠를 보고는 꼬리를 치며 집으로 따라 들어왔다고 한다. 오빠는 개한테 있던 흉터를 보고 그 홍수 때 잃어버린 우리 개란 걸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개 이름이 뭐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 개는 아침마다 중학교에 다니는 오빠를 학교까지 배웅해주고, 집으로 와서 국민학교에 다니는 언니도 따라가려고 했지만 언니는 그걸 싫어했다. 점심시간엔 다시 오빠 학교에 가서 도시락 밥을 얻어먹고 오기도 했다.     

엄마와 아버지는 오빠와 언니를 서울에서 공부시키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래서 이사하기 전에 개를 팔았는데 며칠 후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탈출했던 모양이었다. 지하실에 들어가 쌓아놓은 짐 위에 올라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급기야 개장수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오빠가 지하실로 들어가고 나도 따라 들어갔다. 오빠가 개를 억지로 끌어내지 않았다.  울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우리는 이사 간다. 기차 타고 서울로 가는데 너를 데려갈 수 없다.  미안하다. 뭐 그런 얘기였던 거 같다.

그때 나는 개가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걸 봤다.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오빠는 더 많이 울었겠지.

그런데 개가 스스로 높은 곳에서 내려오더니 지하실 밖으로 나가서 개장수의 자전거 뒤에 실린 철창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개장수도 미안한 표정이었던 거 같다. 그렇지만 철창 우리의 문을 잠그고 떠나버렸다.

그날 우리 식구들은 저녁밥을 먹지 못했다. 모두 울고 있었다.

오빠는 개를 판돈으로 기타를 샀다. 개가 기타 소리를 좋아했다고 오빠가 말했다.   

  

앞마당에 나무나 꽃이 있었던 기억은 없다. 뒤뜰에 가느다란 나무가 두 그루 정도 있었는데 엄마 품에 안겨 사진을 찍었던 자리에서 혼자 찍은 사진이 있다.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인다. 잎이 다 떨어진 가느다란 나무를 잡고 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아마도 그 사진을 찍고 멀지 않은 때에 이사를 했던 거 같다.


이제 나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있다. 옛날 기억을 꺼내다 보니, 돌아가신 오빠와 눈물 흘리던 개가 그리우면서도 아련하다. 다른 세상에서라도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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