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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나무 Jan 21. 2023

비밀을 만드는 아이들 1

은재와 우빈

    

1. 은재와 우빈 

    

“우빈아, 나는 네가 부러워.”     

수업을 마치고 은재와 우빈이는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며 학교 밖으로 나왔다. 둘이 서로 반대편에 있는 집으로 가려면 헤어져야 했다. 보통은 학교 모퉁이에서 한 손을 들고 ‘안녕~’하고  인사를 한다. 

그런데 은재는 발걸음을 멈추고 엉뚱한 말을 했다. 우빈이와 재잘재잘 명랑하게 얘기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시무룩한 표정이 됐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가 가엾기라도 한 것처럼 한숨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응? 뭐가?”

갑작스러운 은재 말의 숨은 뜻을 알 수 없어서 우빈이가 물었다.

“너는 출생의 비밀이 있잖아.”

은재는 우빈이가 진짜로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여전히 우빈이는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갸웃하며,

“내 출생의 비밀이라니?”하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은재는 이제 집 쪽으로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라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어머! 너랑 우주랑 전학 온 날, 소개하면서 쌍둥이지만 누가 동생인지는 비밀이라고 했잖아.”

그제야 우빈이는 알겠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 그건 우리 엄마의 비밀이지. 나랑 우주는 진짜로 몰라. 엄마, 아빠가 말을 안 해 주니까. 그런데 넌 그게 왜 부러워?”     

은재는 우빈이와 헤어지기 싫었다. 우빈이랑 있으면 마음이 통하는 거 같고 언제나 재미있는 얘기가 줄줄 나와서 좋았다. 계속 얘기를 더 늘어놓고 싶었다.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만 보는 건 아쉬웠다. 늘 좀 더 놀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날은 더욱더 그랬다.      

집에 가면 할머니가 오셔서 간식도 차려주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묻곤 하신다.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매일 변화가 없고 똑같다. 우빈이랑 얘기하면 언제나 새로운 얘기가 퐁퐁 솟아나는 기분이다. 그래서 헤어지는 시간을 늦추고만 싶었다. 

만약 언니나 오빠가 있거나 동생이라도 있으면 집에서도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엄마에게 동생 하나 낳아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엄마는 그런 얘기조차 피곤한지 고개를 저었고, 요즘 엄마 아빠는 더 많이 바빠졌는지 은재와 도란도란 얘기 나눌 시간도 없어 보인다.     

그리고 매일 똑같은 학교, 학원에서 반복되는 것들이 지겨웠다. 뭔가 새로운 일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비밀스러운 일이라면 더 좋을 거 같았다. 


어쩌면 우빈이가 은재의 바람을 알아줄 수도 있을 텐데... 집 쪽으로 발걸음을 떼지 않고 학교 모퉁이에 서서 신발주머니를 무릎으로 툭, 툭, 건드리면서 은재가 말을 이었다.     

“특별하잖아. 비밀이 있으면... 나는 매일 똑같거나 비슷한 거 말고 좀 다르고 특별한 일이 생기면 좋겠어. 너랑 우주는 항상 다른 일이 많아 보여.”

“으응. 그래서 부럽다고 생각하는구나. 근데 나랑 우주는 이란성쌍둥이 남매인 거도 싫고, 엄마랑 아빠가 누가 동생인지 얘기 안 해주는 것도 별로야.”

“그래도 난 부러워. 나라면 그 비밀을 캐고 싶어서 알아보려고 할 거 같은데, 너는 안 궁금해?”     

“사람들은 우리가 쌍둥이라고 하면 다~  물어봐. ‘누나니? 오빠니?’ 하면서. 그래서 나도 엄마, 아빠를 조른 적도 있어. 할머니랑 할아버지도 그것 좀 알려준다고 뭔 일 나냐며 궁금해하는데 우리 엄마는 말하지 않겠대. 몇 분 차이로 태어났는데, 서열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거야. 알아서 좋은 건 없고 괜히 둘 다 부담스러운 일이 생길 거라고.”

우빈이는 은재가 부러워하는 출생의 비밀 따위는 별 게 아니라고 얘기를 했지만, 은재는 여전히 발걸음을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빈이는 은재가 집으로 가기 싫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우빈이도 은재와 더 놀고 싶어졌다.     


“은재야, 오늘 영어학원 가는 날이지? 몇 시에 가?”

“4시 40분에 학원버스 타면 돼.”

“아, 그럼 한 시간 정도 남았네. 우리 비밀 만들러 같이 갈래?”

“정말? 좋아! 어디로 가는데?”

“일단 우리 동네에 있는 ‘곰씨콩책방’으로 가자.”

은재가 환해진 얼굴로 얘기했다.

“아, 네가 자주 간다는 그 책방? 거기 가면 뭐 있어?” 

은재는 신이 나서 눈도 반짝이고 입은 방실거리며 발걸음도 가벼워져 통통 튀는 거 같았다. 우빈이도 덩달아 신이 났다.     

“뭔데? 어떻게 비밀을 만들 건데?”

은재는 신이 나면서도 조바심을 냈지만, 우빈이는 당장 설명하긴 어려웠다. 

“네가 비밀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생각나는 책이 있어. 책방에서 내가 본 게 있거든.”


10분쯤 걸어 우빈이와 은재는 주택가 1층에 있는 ‘곰씨콩책방’으로 들어갔다.     

책방은 2층짜리 주택의 1층에 있었다. 책방 출입문은 청록색 나무틀에 울룩불룩한 질감의 유리로 되어 있어서 예쁜 카페 분위기가 났다. 그 옆엔 꽃밭이 있고 꽃밭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도 있는 거 같았다. 

두 아이는 종소리가 울리는 문을 밀고 책방으로 들어갔다. 책을 정리하고 있는 아저씨에게 우빈이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친구랑 책 좀 보려고 왔어요. 괜찮죠?”

“물론이지. 우빈이 친구도 4학년이겠지? 이름은?”

“안녕하세요? 이은재예요.”

“그래. 반갑다. 나는 곰씨야.”

아저씨 외모와 이름이 어울려 보였다. 은재가 재밌다는 듯 생글거리며 물었다.

“책방이름은 곰씨콩인데, 콩은 뭐예요?”

“그건 비밀!”

은재는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우빈이와 눈 맞춤을 하고 ‘헤헤’ 웃었다.

우빈이가 설명해 주었다. 

“은재야, 콩은 아줌마 별명이야.”    

  

우빈이는 은재 손을 잡고 책방 안쪽으로 향했다.

“저쪽으로 가자. 바꿔서 가져갈 수 있는 책만 모아놓은 책꽂이가 있어. 거기에 너한테 보여줄 책이 있거든.”

은재가 살짝 실망의 눈길을 보내자, 옆으로 바짝 붙으며 낮게 속삭였다.

“아주 재밌는 비밀을 만든 주인공이 나오는 책이 있단 말이야.”     

5월의 분위기에 맞춘 듯 꽃 그림책들만 전시된 서가를 지나 안쪽 창가로 갔다. 창밖으로 마당이 보였다. 그곳엔 연한 초록색 잎이 가득한 나무 한 그루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집이 보였다. 빨간 지붕과 창문까지 있고 마치 커다란 장난감인 듯도 싶었다.

“우와~ 저 작은 집은 애들 장난감일까? 저기서 소꿉놀이 하면 좋겠다.”

“나도 처음 여기 왔을 때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창고래. 이 책방에 있는 것들은 다 예쁜 거 같아. 그렇지?”

은재가 사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빈이는 은재가 ‘곰씨콩책방’에 처음이라 이것저것 소개하고 싶은 맘도 있었지만 먼저 해야 할 게 있었다. 작은 테이블 옆에 의자 두 개와 5단짜리 책꽂이가 있었다.


“여기 있는 책들은 자기가 읽은 책이랑 바꿔서 가져갈 수 있게 해 놓은 것들이야. 대신 새 책을 살 때만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럼 파는 게 아니고?”

“응 파는 건 아니래. 나는 지난번에 <거미 아난시>를 여기 두고 <책과 노니는 집>을 가져갔어. 그런데 그때 이거 <클로디아의 비밀>도 조금 읽어봤거든. 얘가 동생이랑 가출계획을 세우는 거야. 재밌겠지? 근데 한 권만 바꿀 수 있어서 <책과 노니는 집>을 선택했지. 그 책엔 예쁜 그림이 많고 나는 역사 얘기를 더 좋아하거든.”

“학교 도서관에서 빌리면 되겠네.”

“도서관에서 찾아봤는데 이건 없더라. 사서 샘이 그러는데 이 책은 오래전에 나온 책이라서 우리 학교처럼 생긴 지 얼마 안 된 도서관엔 없는 거래.”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으면 비밀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도 책 주인공 흉내를 내볼 수도 있고.”

은재가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시계를 보고 말했다.

“곰씨 아저씨한테 이 책 빌려달라고 부탁해도 될까?”

“글쎄. 책방에서 정한 규칙에 어긋나는 거라서 부탁하긴 쫌... 그냥 일단 오늘은 조금 읽어봐. 엄마랑 내가 책 사러 올 때, 다 읽은 책 하나 들고 와서 이걸로 바꿔서 너한테 줄게. 근데 우주한테는 비밀이다. 알았지?”

“응. 비밀! 나 그거 정말 좋아.”

은재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은재는  앞부분에 나오는 편지를 읽을 땐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다시 앞장으로 넘어가 두 번씩 읽기도 했다. 클로디아가 동생과 수요일 악기 수업이 있는 날, 가출하는 장면이 나오자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시간이 훌쩍 지나 학원 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할머니 전화를 받고 아차 했다.

“은재야, 아직도 학교에 있니? 조금 있으면 영어학원 버스가 올 텐데...”

“친구랑 책방에서 책 읽고 있었어요. 할머니 내 방에 영어 학원 가방 들고 1층으로 좀 갖다 주세요. 지금 갈게요.”     

은재는 책방에서 일어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우빈아, 이 책 다른 사람이 바꿔 가면 어쩌지?”

“정말! 그러면 안 되는데...  숨겨둘까? 잘 안 보이게.”

“그래, 그러자!”

우빈이와 은재는 속닥속닥 낮은 소리로 얘기하고 <클로디아의 비밀>을 다른 큰 책들 안쪽으로 가로질러 숨겨놓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곰씨 아저씨는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안녕히 계셔요. 다음에 또 올게요.”

“벌써 책 다 본 거야?”

“학원 시간이 다 돼서 가야 해요.”

“그렇구나. 우빈아, 우주한테 내가 줄 게 있다고 책방에 한번 오라고 해줘.”

“네. 우주한테 뭘 주실 건데요?”

“그건 비밀이야.”

곰씨 아저씨와 우빈이가 하는 얘기를 듣고 은재가 한마디 했다.

“아저씨는 비밀이 많네요.”     


며칠 동안 은재는 <클로디아의 비밀>을 기다리느라 애가 탈 지경이었다. 엄마에게 동화책 한 권을 사달라고 말해볼까 잠깐 생각도 해봤지만, 비밀을 만든다면 엄마에게 들키지 말아야 하는 게 첫째라는 생각이 들어 우빈이가 책을 가져오는 걸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교실에 들어서자 우빈이가 활짝 웃으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 흔들었다.

“우빈아, 고마워. 너는 나의 진정한 베프야.”

“토요일에 책방에 갔는데 이거 없어졌을까 봐 조마조마했어.”

“넌 다 읽었어?”

“응. 되게 재미있어. 클로디아랑 제이미가... 아, 아니다.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어.”

그때 1교시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은재는 한숨을 쉬며 아쉬워했다.

“아~ 쉬는 시간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4교시에 반 아이들 모두 ‘도담초등학교’ 도서관인 ‘꿈이룰터’로 이동했다. 4학년 1 반월요일 4교시는 다양한 수업으로 진행되는 창체 수업인데, 이번은 사서 선생님이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지난번 도서관 정보 수업에 이어 오늘은 장르별 위치를 살펴본 후, 자유롭게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한 권씩 읽고, 마음에 드는 등장인물을 친구들에게 알려주는 활동을 해볼 겁니다. 끝나기 전에 나눠주는 활동지에 매력 있는 등장인물을 써 주세요.”

“그림으로 그려도 되나요?”

“사람이 아니어도 돼요?”

“네~ 좋습니다.”

귀찮아하며 투덜거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은재는 기운차게 손을 들고 질문했다.

“샘! 제가 가져온 책 읽고 해도 되죠?”

“음 좋아요.”     

선생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은재는 책을 펼치고 읽으면서 우빈이와 모종의 계획을 세울 생각으로 가득했다. 독서수업 시간과 점심을 먹으면서도 내내 책을 읽었지만 다 읽지는 못했다. 주인공 클로디아가 천사의 조각상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애쓰는 얘기가 재미있고 조마조마하면서도 내용이 좀 어려웠다. 그래서 우빈이랑 책 얘기를 나누면 도움이 될 거 같았다.

“우빈아, 나 아직도 다 못 읽었어.”

“글 밥이 많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거 있잖아, 우체국 사서함. 미술관 사람들이랑 편지를 주고받는 거 그게 상상이 안 돼.”

“나도 모르겠어서 우리 엄마한테 사서함 아냐고 물어봤더니, ‘요즘도 있나?’ 하면서 우체국에 자물쇠로 채운 우편함을 만들어 놓고 편지 같은 걸 받을 수 있게 해 놓은 거래. 아마 책에서처럼 돈을 내야겠지?”

“우리도 사서함 만들 수 있을까?”

“글쎄. 사서함 만들어서 하고 싶은 거 있어?”

“아니. 아직은 모르겠어. 얘들처럼 어쨌든 비밀스러운 뭔가를 해보고 싶긴 해.”

은재가 재밌는 비밀을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자꾸 듣다가 보니 우빈이도 같은 마음이 꼬물꼬물 올라왔다.

“후훗~ 나도 그래.”


“그렇지? 우빈아, 우리 같이 어른들이랑 애들 모르게 아주 깜짝 놀랄 일을 꾸며보자.”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은재와 우빈이는 내내 둘이만 붙어 다녔다. 수요일 체육시간엔 4학년 2반과 반 대항 축구를 했는데, 은재와 우빈이는 얘기를 나누려고 선수로 뛰지 않고 나란히 앉아 응원만 했다. 그러다가 우주가 한 골을 넣자,

“우리 우주 최고!”하며 엄지를 추켜들고 둘이서 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수업 중에도 소곤소곤 선생님 눈을 피해 가며 얘기를 나눴다. 수업이 끝난 후엔 집으로 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면서 도서관에 가서 A4 이면지에 뭔가를 그리고 쓰다가 고쳐 쓰기도 했다.     

금요일, 수업이 끝나고 은재와 우빈이는 또 도서관 구석에 있는 2인용 자리를 차지하고 다시 계획 세우는 일에 열중했다.

“수상해!”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왔던 우주가 두 아이를 보고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맞아. 쟤들 뭘 꾸미는 거 같아.”

“요즘 둘이 완전 찰떡이라니까.”

지나가던 같은 반 친구 시아와 하은이도 한 마디씩 했다.

은재는 들킬까 놀라서 얼른 뭔가를 쓰던 종이를 책으로 슬쩍 가리고, 우빈이는 눈을 깜빡거리며,

“우리에게 관심을 꺼 주셔요.” 하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도서관을 오가던 아이들이 모두 가고 은재와 우빈이만 남았다. 

“요 며칠 두 아가씨가 도서관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거 같은 걸? 떡 좀 먹어봐. 과학 선생님이 큰 상을 받았다고 찰떡을 돌리셨거든.” 

사서 선생님은 계속 바쁘게 움직이다가 떡을 주시면서도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4시 30분이 되자, 은재가 책가방을 의자 밑으로 밀어 넣고 보조가방만 들고 밖으로 나가며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세요~”

모니터를 보다가 선생님은,

“그래. 안녕! 그런데 우빈이는 아직 안 가는 거야? 학원 안 가는 날인가?” 하며

잠깐 은재와 눈을 맞추고 다시 모니터에 눈길을 주었다.     

잠시 후, 우빈이는 책 한 권을 들고 사서 선생님 자리 옆쪽에 있는 ‘어울림교실’로 향하며 말했다. 

“샘! 어울림 교실에서 숙제하고 가도 되죠?”

‘어울림교실’은 도서관에 딸려 있는 교실인데, 독서 수업이나 정보화 수업, 때로는 학생 자치활동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렴.”

선생님은 돌아보지도 않고 ‘타닥타닥’ 자판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40분쯤 후, 사서 선생님은 컴퓨터를 끄며 우빈이를 불렀다.

“우빈아~  아직도 숙제 덜 끝났니? 이제 나는 가야 하니까 너도 가자.”

우빈이는 후다닥 가방을 챙기는 척하며 얼른 나왔다. 선생님도 가방과 핸드폰, 자동차 열쇠를 챙겼다. 사서 선생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우빈이를 보면서 

“우빈이랑 같이 나가니까 좋구나.” 하고 말했다.      

우빈이는 선생님이 자신을 예쁘게 봐주니 속으로 좀 뜨끔하고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선생님이 #버튼을 누르고 도서관 문을 잠그는 걸 똑똑히 봤다. 그리고 도서관 옆에 있는 3학년 4반 교실 안을 보고, 어디라도 소리가 들리나 주의 깊게 살폈다. 아이들 자리는 물론이고 선생님 자리도 비어 있었다. 다른 교실에서도 아무 소리가 없는 걸 보면 학교가 텅 빈 거 같았다.      

도서관이 있는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며 우빈이는 ‘흠, 흠!’하며 헛기침 같은 소리를 내다가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려는 듯 선생님에게 물었다.

“샘들은 모두 5시에 퇴근해요?” 

“대개는. 그런데 선생님들마다 조금씩 달라. 아마 교무실에 아직 계신 분도 있을 거야. 그런데 우빈이는 어울림 교실에서 무슨 숙제했어?”

“음~ <가을이네 장 담그기>에 나오는 낯선 말들을 사전에서 찾아보기 하는 거요.”

“아,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책이구나?”

“네. 그런데 된장 담그는 농장으로 현장학습 가서 배우면 더 좋을 거 같아요.”

“호, 그래? 그러면 좋겠다. 그런데 지금은 계절이 안 맞네. 그리고 그건 쉽지 않을 거 같아. 콩 추수 끝난 후 콩 삶아 메주 만들고, 띄우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고 그다음에 메주에 소금물 붓고 또 한참 지나 간장 빼서 달이고...  장 담그는 게 절차도 많고, 오래 걸리니까.”

사서 선생님은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우빈이는 선생님 얘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1층에 내려와 학교 담장 쪽 건물과 운동장 쪽 건물을 이어주는 구름다리 아래에서 선생님은 열쇠를 꺼내 주차장 쪽을 향해 버튼을 눌렀다. 하얀색 승용차가 ‘삐빅’ 소리를 내며 불을 껌뻑거렸다. 

우빈이는 구름다리 아래에 있는 사방치기 그림이 위에 가만히 서서 주차장을 살폈다. 까만 차 한 대와 회색 차도 한 대 보였다.       

“잘 가~~.” 선생님이 인사할 때, 우빈이가 깜짝 놀란 듯 소리쳤다.

“어? 어떡하지? 샘! 나 핸드폰을 ‘어울림 교실’에 놓고 왔나 봐요.”

“저런~ 어쩌냐? 우빈이 도서관 비번 아니?”

“아뇨.”

“6학년 도서부면 알 텐데... ‘**0909 그리고 다시 *’ 외울 수 있지? 핸드폰 찾은 다음에 문 닫고 # 버튼 누르면 잠겨. 나는 사서 선생님들 모임이 있어서 늦지 않으려면 얼른 가야 하니까 우빈이가 핸드폰 찾고 문단속해줘. 부탁한다. 안녕~”     

우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른 몸을 돌려 3층을 향해 뛰었다. 


‘휴~  예상대로 됐어. 은재야, 이제 내가 간다. **0909*, **0909*...’ 하며 급하게 3층에 있는 화장실로 올라갔다. 복도와 모든 교실은 아주 조용했다.

“은재야, 은재야~ ”

우빈이가 조심스레 작은 소리로 은재를 불렀다.

제일 안쪽 화장실 문이 열리고 은재가 나타났다.

“이제 다 갔어? 아무도 없는 거 맞겠지?”

“아직 교무실엔 누가 있을지도 몰라. 주차장에 차가 두 대 있어.”

“보안관 아저씨가 오기 전에 빨리 도서관에 가서 숨자.”     

은재와 우빈이는 조마조마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서관 번호키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한동안 몸을 낮춰 복도에서 사람이 지나가도 보이지 않을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혹시라도 웃음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빛만 서로 교환했다. 누군가 지나가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아 잠시 긴장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을 켜지 않은 도서관에서 한참 동안 둘만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너무 좋았다.     

둘은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싶고 마구 웃음이 나오려는 했다. 그래도 용케 참고 손짓을 해가며 신발을 벗고 ‘꿈다락’으로 올라갔다. ‘꿈다락’은 도서관에서 아이들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좋아하는 자리다. 운동장 쪽 창 아래 작은 집 모양의 지붕이 있고 두 계단 올라가 있다. 비가 오거나 좀 추울 땐 바닥 난방이 들어와 눕기도 하고 작은 콩의자에 몸을 기대거나 그 위에 올라앉으면 아주 편하기 때문이다. 

우빈이는 도서부 활동을 할 때, 1학년 어떤 선생님이 ‘꿈다락’에서 난방 스위치를 올리고

“에고, 에고 허리야~ ” 하면서 눕는 것도 봤다.     

깜깜하지는 않았지만 곧 어두워질 것이다. 그전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은재는 가방을 찾아 ‘꿈다락’으로 가져오고, 우빈이는 ‘어울림교실’ 책상에 감췄던 핸드폰과 보조 가방을 챙겨 왔다. 이리저리 움직일 때도 두 아이는 소리 안 나게 사부작사부작 작은 동작으로 행동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계속 저절로 웃음이 났다.

“킥킥킥...”

“이히히히...”     

평소에는 몰랐는데 도서관 기둥 벽에 있는 시계 초침 소리가 잘 들렸다. 어느새 6시가 다 되어 있었다. 보통 때라면 은재는 영어 학원에 있어야 할 시간이고, 우빈이는 수학 학원에서 비슷비슷한 수학문제들과 씨름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둘은 이미 짜 놓은 계획대로 오후 4시경 엄마들과 학원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오늘 몇 시에 퇴근해? 나는 모둠 숙제가 있어서, 우빈이랑 도서관에서 숙제하다가 다 못하면 우빈이네 집에 가서 더 해야 할지도 몰라. 할머니한테 얘기 좀 해줘. 지금 전화 안 받으셔.”


“샘~ 저 은재인 데요, 오늘 학원 못 가요. 대회에 나가는 모둠 숙제를 다 못해서 친구네 집에서 늦게까지 할 거 같아요. 엄마가 퇴근하고 데리러 오신대요.”


“선생님~ 오늘 중요한 모둠 활동이 있어서 수학 학원 못 가요. 숙제는 다 했으니까 다음 시간에 보여드릴게요.”   

  

은재와 우빈이는 계획대로 핸드폰 전원을 껐다. 그리고 서로 어떤 걸 챙겨 왔는지 보여주기 위해 가방에 있는 걸 모두 쏟았다. 둘 다 영어, 사회, 국어 교과서와 필통 따위는 교실 사물함에 넣어 두었다. 은재 가방에서 잠옷과 포켓몬 빵, 음료수, 과일믹스 젤리, 새알 초콜릿 그리고 토끼인형과 수건, 칫솔이 나왔다. 우빈이 가방에서는 물병과 치즈빵, 초콜릿과자, 사과 맛 색종이 과자, 칫솔과 치약, 그리고 작은 손전등과 충전기가 나왔다. 이미 둘이 만든 계획표 준비물에 들어 있던 거다. 은재가 눈짓과 손짓으로 잠옷을 입자고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니 어둠이 조금 깔린 거 같았다. 우빈이가 소곤소곤 말했다.

“이렇게 잠옷을 입고 있으니까 클로디아랑 제이미가 미술관 침대에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좀 느껴져.”

“맞아. 나 아까 3학년 선생님이랑 도서관에 있던 애들이 화장실에서 나간 다음에 너 기다리면서 걔들처럼 변기 위에 발을 올리고 문도 살짝 열어놨었어. 크크...”  

   

사서 선생님이 준 떡을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래도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새알 초콜릿과 사과 맛 색종이 과자를 나눠 먹었다.

“이 도서관에도 뭔가 수수께끼가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은재가 아쉬운 듯 말하자, 우빈이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비밀을 품은 조각상은 없을 테고, 우리가 밝혀낼 비밀이 담긴 책이라도 있으려나? 좀 찾아볼까?”

“아니, 아직은 안 될 거 같아. 조금 더 조용히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은 더 어두워졌다. 차츰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려고 했지만, 은재는 그런 생각을 얼른 쫓아냈다. 은재가 우빈이에게 졸라 이 일은 시작된 거고, 우빈이가 있어서 든든했다. 


은재가 보기에 우빈이는 겁도 없고 뭐든 척척 잘 준비하고 해결하는 거 같았다. 함께 가출 계획 짜기가 재미있고 신났다. 클로디아와 제이미처럼 미술관으로 가출하고 싶다고 은재가 말했다. 우빈이는 미술관에 숨어 지내는 것보다 익숙한 학교 안으로 가출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은재는 우빈이가 친구라기보다는 언니 같이 느껴지고 믿음직스러웠다.      

주차장 쪽에서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서 살짝 일어나 창밖을 보니 교문 밖으로 하얀 차가 나가고 있었다.


“이제 회색 차 하나만 남았어. 아저씨 차일까?”

우빈이가 말했다.

“보안관실에 불이 환해. 아저씨는 밤새 자지 않고 학교를 지키나 봐.”

은재는 아저씨가 저기 있구나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좀 놓이는 거 같기도 했다.

학교는 너무나 조용했고, 교실이나 복도, 운동장 어디서도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멀리서 오토바이 소리가 간간이 들리고,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만 계속 들렸다.     

“우리, 빵 먹자. 그리고 초콜릿도 다 먹자.”

우빈이가 빵 봉지를 벗기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만 다 먹으면 안 돼!”


이제 은재는 속닥거리지 않고 제법 또렷한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그리고 빵과 음료수를 조금씩 먹었다. 우빈이는 우걱우걱 열심히 먹었다. 빵을 씹으며 우빈이가 말했다.

“우리 여기서 얼마 동안이나 안 들키고 있을 수 있을까?”

“클로디아랑 제이미는 밥 사 먹을 곳도 있었지만, 우린- 어렵겠지? 혹시 급식실 냉장고에 먹을 게 있을까?”

우빈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이 잠겨있을 걸.”

은재는 가방에 넣어온 먹거리로는 토요일도 넘기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배가 고프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 보았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으면 쓰러져서 비참하게 죽게 될까?


우빈이와 만든 계획표엔 도서관에 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허술했다. 클로디아와 제이미의 계획도 그랬다. 그래도 그 아이들은 조각상의 비밀을 간직한 부잣집에 가서 근사한 목욕탕에서 씻고 식사도 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어떤 중요한 비밀을 찾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거 같다. 집이 아닌 다른 멋진 곳이 아니라 무서운 곳으로 끌려가게 될 수도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런데 은재야, 너는 꼭 여기서 자고 집에 가야 돼? 안 무서워?”

우빈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은재에게 물었다.

“네가 있는데 왜 무섭겠어?”

은재는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나중에 우리 엄마, 아빠한테 엄청 혼날지도 몰라. 혼나는 거는 안 무서워?”

“그건, 쫌 무섭긴 해. 그리고 어두워지는데 불을 켤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은재는 대답을 다 하지 못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은재가 우니까 우빈이도 눈물이 났다.

“지금 집에 가고 싶어도 1층 현관문이 잠겨있을 거야.”

울음소리가 더 커진 은재가 말했다.      

“엄마에게 전화하면 어떨까?”

“엄청 화낼 거야. 화 풀어질 때까지 더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보안관 아저씨에게 소리 지르면 들릴까? 도서관 불을 켜면 아저씨가 1층 문을 다시 열지도 몰라.”

“아저씨에게 야단맞는 게 더 무서워. 어떡하지?”


은재와 우빈이는 망설이가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뭐라고 얘기할지를 의논했지만, 딱히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핸드폰의 전원을 켜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좀 더 흘렀다.     

8시 40분쯤, 아래층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은재와 우빈이는 마음을 졸이며 바짝 붙어 앉아 손도 꼭 잡고 있었다. 잠시 후 3층 복도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우빈아, 우빈아~~”

‘꿈다락’에서 긴장한 모습으로 있던 은재와 우빈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맨발로 도서관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유리문 밖에 서 있는 우빈이 엄마와 경비 아저씨를 보고 얼른 문을 열었다. 야단맞을 걱정은 까맣게 잊고 엄마 품으로 향했다.

 

열쇠 꾸러미를 든 아저씨와 엄마가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김우빈! 핸드폰은 왜 꺼놨어?”

“우빈이 너~ ”

엄마의 폭풍 같은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은재와 우빈이는 괜찮았다. 왜 그런지 눈물이 쪼금 나긴 했지만 무서운 것도 슬픈 것도 아니었다. 조금 아쉬운 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이 일을 비밀에 부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큰일이니 엄마가 단속 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우빈이 엄마는 ‘꿈다락’에 흩어져 있는 빵 봉지며 과자 봉지들을 청소하라고 말했다. 두 아이가 정리를 하고 각자의 가방을 챙기는 동안에 엄마는 아저씨에게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아빠와 전화 통화를 했다. 

    

은재 할머니와 전화를 한 후, 은재를 집 앞까지 차로 태워주고 집에 도착할 무렵 엄마의 잔소리는 끝이 났다.

“엄마, 우빈이랑 어디 갔었어?”

“음-  그건 미안하지만, 비밀이야.”

우주는 쏘아보는 눈빛으로 우빈이에게 말했다.

“너, 학원 빼먹어서 엄마한테 야단맞은 거지? 분명히 은재네 집에서 땡땡이치고 놀았겠지.”

“자, 이제 됐으니까 씻고 잘 준비해라~ 오늘 아빠는 일이 있어서 좀 늦을 거야.”

풀 죽은 모습으로 방에 들어가는 우빈이를 쏘아보며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안방에 들어가 화장대 위에 접혀 있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어휴! 참내~ 기가 막혀서... 애들 키우기 힘들다, 힘들어.”하고 혼잣말을 하며 편지지를 반으로 접고 한 번 더 접어 서랍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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