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강율
3. 우주와 강율
여름 방학을 며칠 앞둔 수요일 오후 강율이는 학교에서 집으로 가서 가방을 두고 낯선 동네를 찾아갔다. 집에서 먼 곳은 아니지만 학교를 중심으로 집에서 반대편에 있는 주택가를 혼자 가는 건 처음이었다. 친구들 집이나 학원은 강율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에 몰려 있었다. 강율이는 쪽지에 그려진 지도와 주소를 보며 골목에 있는 집들의 주소와 맞춰 봤다.
열매마을 송이로 21번 길 18-17
‘어? 주소는 맞는데... 여기는 책방이잖아.’
날씨가 더워 짜증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책방 문을 열고 안을 들려다 보았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동글동글한 미소를 지으며 아줌마가 인사를 했다.
“어서 와요. 처음 보는 친구네.”
“저- 어떤 애가 이 주소로 찾아오라고 해서요.”
강율이가 아줌마에게 쪽지를 슬쩍 보여주며 말했다.
“아! 누군지 알겠다. 음 그 애 집은 안쪽 뜰로 들어가면 있어. 책방 옆 꽃밭을 지나서 안으로 쭈-욱 들어가면 작은 집이 보일 거야. 벨은 없으니까 문을 두드려보렴.”
강율이는 후회를 했다. 교실 사물함에 붙어 있는 쪽지 편지를 보고 도대체 누가 이런 걸 보냈을까 궁금했다. 또, 쪽지에 있는 ‘똑똑하면’ ‘용기 있다면’이라는 말에 자극받아서 몇 번이나 읽어보고 싸움까지 각오하고 찾아왔다. 그런데 또 다른 시험이 있는 것만 같았다.
책방을 나와 꽃밭 근처에서 안을 살펴봤다. 꽃들과 작은 나무가 몇 그루 있고 잔디가 있는 마당만 보였다.
‘저 안에 집이 또 있다고?’
좀 이상했다. 뭔가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도 나고 좀 무서운 마음도 들었다.
‘어떡하지? 이제라도 집으로 갈까?’
그러다가 다시 쪽지를 읽었다.
하강율에게
하강율!
너는 나를 모욕했다.
만약 네가 똑똑하고 용기가 있다면 나를 찾아올 수 있을 거다.
만나서 대결하자.
수요일 오후 2시까지 찾아와라.
내 집은 열매마을 송이로 21번 길 18-17에 있다.
만약 네가 안 나타나면 나는 너를 바보 쫄보라고 생각할 거다.
내 이름은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
‘치 도대체 누구야?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상우가 봤으니까 선생님한테라도 말하겠지?’
강율이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그러다가 쪽지를 보낸 게 누군지는 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쪽지는 주머니에 넣고 양손으로 어깨에 멘 가방끈을 꼭 쥐고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니야옹~” 하는 고양이 소리가 들려 흠칫 놀라 돌아봤다. 작은 바위 위에 앉은 하얀 얼굴에 까만 콧수염 모양 얼룩이 있는 고양이와 누런색 줄무늬 고양이가 보였다.
“안녕? 거기 앉아 있으면 안 더워?”
강율이는 혹시라도 닥쳐올 무서운 일을 조금이라도 늦춰보려 발걸음을 멈추며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안에 집이 또 있어? 너네는 아니?”
콧수염 고양이가 강율이를 빤히 보며 다시
“니야옹~~” 하더니 총총 걸어가고, 줄무늬 고양이도 따라갔다.
고양이가 가는 방향을 따라 강율이의 눈길 쫓아갔다. 붉은 꽃이 가득 핀 배롱나무 옆에 하늘색 창고 같은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늘어진 나뭇잎 사이로 빨간색 지붕도 보였다. 그때 문이 열리며,
“잘 찾아왔네.” 하고 우주가 나타났다.
“어? 나무막대기. 너였어?”
“나무막대기가 아니고 나는 김우주다!”
우주와 강율이는 서로를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강율이가 가방을 벗어 마당에 풀썩 떨어뜨리며 말했다. 상대가 우주인 걸 알고 나니 긴장이 좀 풀리고 목이 말랐다.
“저게 너네 집이냐? 물은 있어?”
“저건 내 집이야. 설마 우리 식구가 사는 집으로 생각하는 거야?”
“치~ 너 여기서 잠도 잘 수 있어? 물은 있냐고?”
우주가 눈을 한번 흘기더니 책방으로 가서 물 한 병과 컵 두 개를 들고 나왔다.
시원하게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강율이가 물었다.
“그 아줌마가 네 엄마야?”
“아니. 책방 아줌마. 콩 아줌마야.”
“콩? 웃긴 이름이네. 그럼 곰씨는 뭔데?”
“곰씨는 책방 아저씨 이름이지. 아저씨가 나한테 저 집을 1년 동안 임대해 줬어.”
우주와 강율이는 왜 만났는지를 잠시 잊은 듯 집 얘기로 한참을 보냈다.
우주네 엄마가 예전부터 단골이었던 ‘곰씨콩책방’ 근처에 이사를 오게 된 건 순전히 엄마 때문이었지만, 우주는 마당 구석에 있는 작은 집을 아지트로 만들고 싶어서 이 열매마을로 이사 오는 게 좋았다는 것과 곰씨 아저씨가 우주가 아지트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고 열쇠를 주고 작은 집을 1년간 빌려주었다는 것까지...
“근데 아지트가 뭐야?”
“일종의 비밀장소, 나의 본부.”
“비밀 장소?” 하면서 강율이가 작은 집 안을 들려다 보았다.
문을 열어보니 작은 창문도 있고, 등받이가 있는 허름한 나무의자 두 개와 동그란 모양의 작은 의자 하나가 있고, 그 위엔 들고 다닐 수 있는 선풍기가 있었다. 벽에는 도화지에 그린 그림과 장난감 자동차 몇 개와 막대기 같은 거도 보였다.
“아직 다 꾸민 건 아니야. 지금은 전깃불도 없지만 충전용 램프를 갖다 놓으면 끝내줄걸. 그러면 밤에도 사용할 수 있어.”
“야아~ 진짜 짱인데!”
이제 강율이는 싸우려고 마음먹은 것까지 잊어버린 거 같았다. 그렇지만 우주는 아니었다.
“하강율! 너는 내가 왜 너를 여기로 불렀을 거 같냐?”
“아참! 이상한 쪽지 보내서 무슨 대결을 하자는 거냐?”
“하~참. 너는 네가 한 짓이 어떤 건지 아직도 모르겠냐?”
“내가 뭘?”
“너는 나랑 우리 우빈이를 모욕했어!”
강율이가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우주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응 그거? 그건 미안해. 실은 우빈이를 좀 골려주려고 그랬는데 하다 보니까 너까지 세트로 별명을 만들게 됐어.”
“넌 그게 별 거 아닌 줄 아나보다. 나도 하강율, 너 이름으로 아주 웃긴 별명을 만들어 봤어. 아직 소문은 안 냈지만, 네가 어떻게 하나 봐서 나도 내가 만든 네 별명을 퍼뜨릴 거야. 너는 같은 반도 아닌 우리를 놀리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그건- 그건 미안하긴 한데 말할 수는 없어. 내 비밀이거든.”
“비밀?”
강율이를 쳐다보며 우주가 물었다. 강율이는 대답대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가 생각한 웃긴 별명은 뭔데?” 강율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하강율, 하강율이, 하강유리, 하강하는 유리. 그렇다면 그건 아래로 떨어지겠지? 그럼 너는 ‘깨지는 유리’가 되는 거야.”
손짓까지 하며 우주는 자신이 만든 별명을 큰 소리로 떠들었다.
“으~~ 악! 최악이다.”
강율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우주는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기분이었다.
“어때?”
“졌다, 졌어. 이젠 다시는 별명 부르지 않을게.”
“다른 애들이 부르는 건 어떻게 할 거야?”
“그건 내가 아니잖아. 그거까지 내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겠어?”
강율이는 곤란해하며 말했다.
“나한테 방법이 있어.”
우주는 그것까지 다 미리 생각해 둔 똘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게 뭔데?”
“저작권이란 거 알아?”
“들어본 거 같기는 한데 잘 몰라.”
“그건 말이지, 어떤 걸 처음 만든 사람이 갖는 권리야. 그러니까 네가 만든 우리 별명을 다른 애들이 말하면 네가 가서 저작권 비용을 받는다고 말하는 거야.”
“돈을 달라고 하란 말이야?”
“응.”
“그러면 애들이 별명을 안 부르게 될까?”
“돈을 주면서까지 별명 부르고 싶은 애는 없겠지 뭐.”
강율이는 우주가 존경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저작권 얘기를 잘 못할 거 같은데, 좀 어렵잖아.”
“아니야. 너는 똑똑해. 그리고 용감하고. 주소랑 지도 보고 여길 찾아왔잖아.”
“그런가? 알았어. 해볼게. 그리고 우주야. 나 여기 가끔 놀러 와도 될까? 내가 과자랑 음료수도 사 올게.”
우주는 강율이의 부탁을 받고 잠깐 생각해 봤다. 비밀장소라고 해도 혼자인 것보다는 둘이 아는 게 더 재미있을 거 같았다.
“그래. 가끔씩이라면 좋아. 열쇠는 나만 가지고 있으니까 미리 나한테 얘기하고.”
강율이는 웬 횡재냐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여긴 비밀장소니까 다른 애들에겐 비밀이란 거 잊지 마! 우리 우빈이한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