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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Jun 27. 2023

낭비의 충만

자유로웠던 이십 대 시절의 여행이 가끔 꿈에 나오곤 한다.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다 문득 여행이나 갈까 하는 생각에 잠옷 한 벌과 세면도구, 숙소에서 글을 쓸 테니 노트북과 필름이 몇 장 남지 않은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백팩에 넣고 무작정 버스터미널로 가 여행지를 골라 떠났던 그 시절.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기에 어딜 가도 상관이 없었고 무엇을 해도 아깝지 않았던 시간의 낭비가 마음의 충만을 주던 젊은 날이 그리워 꿈에 나오나 보다. 

터미널 매표소 앞에 서서 고른 곳은 대부분 바다가 있는 곳이었다. 남해는 너무 멀고 서해보다는 동해가 물이 맑다고 느껴 동해를 가는 일이 많았다. 고속도로 위에서 화장실이 급해질까 불안해하는 성격이라 두 번이나 볼 일을 본 뒤 탄 버스에서 혼자 묵기에 숙박비가 부담이 되지 않으나 반드시 바다가 보이는 숙소를 예약하고 맛집을 검색해 본다. 혼자 가는 여행이니 2인분부터 주문 가능한 음식 같은 건 제쳐둔다. 바다로 가니 저녁엔 회센터에서 저렴하게 살 수 있는 회 한 접시를 알아보고 낮에는 수제버거에 맥주 같은 걸 고르고 마지막으로 조용히 혼술을 즐길 수 있는 바가 있는지 검색해 본다. 

버스 안에선 나름대로 여행 루트를 열심히 짰지만 막상 내리고 나면 일단 걷는다. 터미널 주변을 둘러보다 오래된 간판에서 맛집의 냄새가 풍기면 무작정 들어간다. 혼자 하는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선택에 실패해도 타인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자유다. 맛이 없으면 "오늘의 첫 번째 선택은 실패군" 하며 반 공기 남짓 먹은 밥그릇을 내려놓고 나와 다시 터덜터덜 걷는다. 

여행지에선 최대한 많이 걷는다. 걷는 여행의 즐거움은 정해둔 목적지에 도착해 실물을 감상하는 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에 생기는 다양한 감정과 마주하는 풍경들이 목적지보다 더 큰 기억으로 남곤 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걷다 등에 맺힌 땀이 바람에 차가워질 때 즈음 시원한 커피 한 잔을 사들고 아무 해변이나 찾아간다. 친구들과 갈 때는 주문진이나 경포대 같은 곳이 놀거리가 많겠지만 혼자 가는 여행에선 영진해변이나 사근진해변 같은 고요한 곳이 좋다. 아무도 없는 해변에 앉아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비슷하지만 찍을 때마다 다른 파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며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롭고 싶진 않은 여느 현대인처럼 SNS에 혼자 온 여행이 너무 좋다고 외로운 티를 낸다.  

뭔가 즐거운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엉덩이 묻은 모래를 털고 일어나 숙소에 체크인하고 노트북을 꺼내 글을 좀 쓰다 출출해질 때 즈음 회 한 접시를 사 다시 해변으로 간 뒤 스스로는 낭만스럽지만 남들이 볼 땐 다소 처량해 보일 수 있게 돗자리 하나 없이 회와 소주 한 병을 마신다. 

고요한 바다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이 있다. 슬픈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밀려오는 파도에 눈물샘이 부딪히기라도 한 듯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고요한 바다처럼 울기 좋은 곳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파도소리가 제법 커서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젖은 빨래의 건조가 끝난 것처럼 몸이 가벼워진다. 왜 눈물이 났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 

울고 나면 배가 고파진다. 혼술을 하려고 알아둔 바 까지는 거리가 좀 있고 결국 귀찮아서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캔맥주 같은 걸 사서 숙소에서 영화를 한 편 보며 먹는다. 어떤 영화를 보면 좋을까 한참을 뒤적거리지만 결국엔 가장 많이 본 영화를 다시 보는 경우가 많다. 왕가위 영화를 틀어놓고 양조위를 보면서 '크... 눈빛 죽인다' 연신 감탄하다가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잠에 든다. 

술도 많이 마시지 못했지만 나름 해장은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진한 국물이 있는 요리로 해장을 하고 다시 바다를 걷다 버스 터미널로 향한다. 돌아가는 길은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서울, 집으로 가는 지하철, 별 것 없는 여행 짐을 풀고 이제 무얼 하며 살까 다시 고민에 빠지는 시간, 그 시절. 

이제는 매일, 매 시간, 매 순간 할 일이 있다. 어쩌면 바쁘게 살아가게 된 지금의 삶이 어린 시절의 나보다 성실하고 가치 있는 삶이라 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가끔 낭비의 충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던, 현실과 사실만 따지지 않고 몽상과 꿈에 젖어 살던 촉촉한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시절, 그날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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