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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Jan 22. 2024

옥탑의 추억

좁고 추운 옥탑에 살아도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일이 없을 땐 소파에 반쯤 누워 소설을 읽고, 조금 따분해질 때 즈음이면 커피를 한 잔 내려 옥상에 나가 바람을 쐬며 커피를 마셨다. 옥상 난간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괸 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낮에 부는 선선한 바람과 파란 하늘 사이에 군데군데 끼어 있는 구름이 흘러가고, 하굣길 아이들의 떠드는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울릴 때의 여유로움이 몸을 느슨하게 만들 때가 있었다. 


낮인데도 블라인드를 내려 어둑한 방 안에 스탠드의 노란 불을 켜놓고 책상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 노트북을 꺼내 이런저런 글을 쓰다가 별 내용 아닌 것 같아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며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지 고민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하고 싶은 일을 나열해 적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밑에 답을 적어가며 나를 탐구하는 시간 또한 흥미로웠다.


무언가에 떠밀리지 않고, 누군가에게 재촉당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방 안에서 시끄럽지 않은 재즈를 들었다. 딱히 떠오르는 음악이 없을 땐 쳇 베이커나 토니 베넷의 음악을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렸다. 내 공간 안에서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이런 삶이야말로 즐거운 인생이라고 스스로를 고무했다. 

 

공칠이를 산책시키며 동네의 작은 강아지들과 인사를 나누고 들어오는 길엔 편의점에서 싸구려 와인을 신중히 골랐다. 저렴해도 맛있는 와인을 찾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동네 편의점을 하나씩 돌아가며 고른 와인이 그날 저녁과 함께 할 친구였다. 


먹고 싶은 게 떠오를 때 꼭 그 음식을 먹어야 하는 편이고 배가 고프기 전엔 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편이라 낮에는 간단히 먹거나 거르고, 저녁 한 끼를 정성스레 차려 먹는 스타일이다. 혼자 사는 남자의 좁은 집에 커다란 가정용 냉장고를 들여놓은 건 설날에 보내준 김치가 아직 남아있는데 추석이 오기 전에 또 한 번 김치를 큰 통에 넣어 보내는 엄마의 김치를 잘 보관하기 위함이었다. 밥을 굶진 않을까 콩자반이나 멸치볶음 같이 빨리 상하지 않는 반찬을 보내면 대충이라도 차려 먹겠지, 하는 엄마의 택배엔 마트에서도 살 수 있는 시판용 고추장이나 곽으로 된 김도 같이 딸려 왔다. 거기에 바디워시, 샴푸, 비누 같은 것도 함께 오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이런 건 집 앞에서도 살 수 있는데 왜 보내냐고 따졌지만 엄마는 "그게 다 사려면 돈이야, 아들"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보내준 고사리가 곧 쉴 것 같아 남은 고사리를 프라이팬에 털어 넣고 들기름과 마늘을 넣어 파스타를 만들었다. 반쯤 고장 난 가스레인지는 껐다 켜지기를 반복해 요리를 번거롭게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고소한 향이 퍼지는 파스타가 완성 되었고, 파스타 하나로는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기에 부족할 것 같아 냉동실에 보관해 둔 새우를 꺼내 감바스를 하나 더한다. 마늘, 올리브오일, 새우만 있어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감바스가 자취생에겐 참 훌륭한 안주가 돼 주었다. 


오늘의 영화는 무엇으로 하느냐가 가장 커다란 고민이다. 고르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일부러 음식을 다 해놓고 고른다. 음식이 식기 전에 빨리 골라야 한다는 압박감을 갖고 선택해야 그나마 고민을 줄일 수 있다. 


왓챠는 고전이나 단편 말고는 딱히 볼 게 없고, 넷플릭스는 마음에 드는 드라마를 정주행 하고 나면 새 작품이 나올 때까지 볼 게 없었다. 그때 당시엔 디즈니플러스나 웨이브에 이렇다 할 작품이 없어 결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봤던 작품을 다시 보는 경우가 많았다. 봤던 작품을 또 보면서도 명장면에서 감탄사를 내뱉는 건 무한히 반복된다. "저런 영화에 출연해야 하는 건데" 혼잣말을 하며 파스타를 후루룩 먹고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영화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와인은 한 병을 다 비웠다. 한 병을 더 사러 나갈까 고민한다. 그러면 오늘 예상했던 지출보다 만오천 원을 더 쓰는 건데, 하며 머뭇거리던 찰나에 전화기가 울린다. 동네에 사는 친구의 "한 잔 해야지!"라는 연락으로 시작 돼 근처에 사는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한다. 각자 술이며 집에 남아있던 음식을 싸들고 오기도 하고, 다들 밥을 먹었다면서 술이 좀 들어가고 나니 뭘 또 시킨다. 


나 빼고는 아무도 살지 않던 상가 건물은 밤이 되면 아무도 없다. 오로지 옥탑만이 유일한 집이었던 그 방에서 우린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고 유튜브에 노래방 버전 반주를 틀어놓고 노래를 불렀다. 매번 부르는 노래가 거기서 거기인데도 아무 생각 없이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시간은 자유와도 같았다. 


노래방 타임도 끝나고 나면 슬슬 취기가 가득 차오른다. 누군가는 잠들고, 둘셋 쯤 남았을 때면 꼭 숨겨져 있던 이야기가 등장한다. 언제나 그렇듯 '이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로 시작해 '이건 좀 아니지 않냐?'로 끝나는, 결국은 자신이 옳았다고 편을 들어달라는 얘기가 대부분이다. 엄밀히 따지면 둘 다 잘못한 것 같은데 술도 마셨겠다 내 앞에 있는 놈 편 좀 들어주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걔는 좀 문제가 있네!!", "그렇지?!!" 하고 남아있는 캔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면 오늘의 술자리는 마무리다. 


"가자!" 소리에 자던 이도 깨고 다들 익숙하게 쓰레기를 주섬주섬 봉투에 담아 들고 내려간다. 모두가 떠난 자리를 정리하며 싱크대에 가득 찬 설거지를 보고 멈춰 서서 오늘 하고 잘 지, 내일 일어나서 할지 고민하다 이내 침대로 몸을 던진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지만 무언가를 많이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하루. 백수의 삶 같지만 그토록 즐거웠던 자유로운 하루. 좁은 방,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5층 계단, 그곳엔 돈도 성공도 없었지만 막연한 꿈이 있었고 청춘이 있었고 즉흥의 만남이 있던 낭만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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