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주 극성맞은 세포입니다.
난 어떤 설계사 몸 속에서 살아요.
이 설계사는 아주 말랐네요.
단 걸 자주 안먹어요.
비쩍 말라서 긴 얼굴이 더 길어보여요.
지방도 별로 없고
먹는 것도 매일 비슷합니다.
뭘 그리 단백질을 따지고
먹지 말아야할 시간을 따지는지.
내가 살기에 참 척박한 곳입니다.
거기다 거의 매일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운동을 한단 말이에요.
일주일에 최소 4번은
몸 안에서 화염방사기같은 불꽃이 한번씩
화악 일면서 껄렁껄렁한 친구들을 쓸어갑니다.
난 그 난리통에도 잘 살아남아서
몸집을 꽤 많이 키웠어요.
나도 아주 극성맞게 운동하고
잘 피해다니고
세력확장을 위해 열일하거든요.
이 설계사가
몇달을 고민하더니
드디어
무슨 보험을 가입했어요.
심지어 남편까지 말이죠.
이 설계사의 남편은 참 웃긴 사람입니다.
"오빠, 내가 내줄테니까
이번에 암치료비보험 가입하고
내년에 건강검진 종합으로 받자구"
"내가 너꺼도 낼게."
와이프인 설계사가
남편 가족력으로 폐암이 있으니
전이암보장을 좀 올렸단 말이죠.
4만원이 아니라 6만원이 된 걸 보내니
내용을 듣기도 전에
"좀 비싸네"
"내가 낼거야, 가격은 신경쓰지마"
"아냐 내가 내"
"됐어"
질병에 대한 걱정은 설계사만 합니다.
뭐 사람이 먹고 살기 바쁘면 다 그렇죠.
설계사나 의학관련업을 하는 사람들말고는
모두 '설마 내가?' 하지 않을까요.
ㅎㅎ
이 설계사도
좋다고 다 가입하는 스탈이 전혀 아니에요.
머리속에는 늘
'좀 더 지켜볼까' 라는 말풍선이 제일 많습니다.
가입한다는 고객을 말릴 때 보면
참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덜컥
자기것과 남편까지 뭘 가입하고 서명하더라구요.
설계사가 몇달째 고민하고
생각한 게
온통 내 얘기뿐입니다.
암 걸리면 얼마가 나오고,
치료비로 얼마를 쓰면 또 얼마가 추가되어 나오고
그런 보험이었던 겁니다.
맞아요
난 주변을 내 색깔로 물들이고
내 구역으로 점점 장악해가는
암세포입니다.
나를 죽이는데 엄청난 돈이 든다지요?
그것 때문에 또 수많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혜택받을 수 있는 암치료비보험을
찾고 가입한다지요?
작년 초던가..
세브란스병원에 나만 쫓아서 핵무기를 투척하는
중입자방사선이란 게 생겼다면서요.
그게
사람몸을 통과할 땐 큰 요동이 없는데
나만 공격하는 거래요.
완전 두껍고 무겁고 강한 방사선으로요.
그 두껍고 무겁고 강력한 빔을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조준이 어렵고 해서
몇천만원 든다고 하더라구요.
10번에 5천이던가.
한번에 500이라니 허 참.
건강보험 적용도 안되서
돈 없으면 포기해야하고요.
가끔 내가 살고 있는 이 설계사가
고객이란 사람과 통화할 때
주워듣는게 있어요.
"맞아요, 고객님처럼 항암치료 없이 수술로 암세포를 모두 제거한 분들은 산정특례제도로 충분히 치료비도 혜택받고, 일상으로 복귀도 많이 어렵지 않아요. 치료비 300만원도 안들었다고 하셨죠? 근데요, 모두 그런 건 아니에요.
지금의 암치료비보험은 고객님처럼 완전 초기에는 큰 체감이 없어요. 전이되거나 재발했을 때, 내가 이미 받아서 쓰고 더이상은 없는 암진단비를 대신하는 걸 준비하는거에요.
아바스틴이란 표적항암약물이 대장암환자는 정부지원이 되지만, 악성뇌종양 환자는 전액 환자부담이거든요. 암유형에 따라서 사용가능한 약물도 다르고 가격도 천차만별이에요. 뇌종양 환자분이 이 약물 주사 한번 맞을 때 130정도 들어가는데 비급여 항암제 외래진료는 입원처리를 안해줘요. 실비가 외래는 하루 20만원만 보상되니 주사맞을 때마다 110만원은 고스란히 환자가 내야하는건데...이 치료가 몇회차까지 이어질지 알수도 없구요. 효과는 있는데 더디면 열번 스무번 이상을 더할지도 모르고, 더 비싼 항암제를 써보자고 하면 더 큰 고민이 생기겠죠.. 이럴 때를 대비해서 회사들이 판매하게 된 게 암치료비보험이에요."
이름도 생소한 아바스틴이라..
대장구역은 할인해주고
뇌구역은 안되나봐요?
근데 어떤 사람이
"저희집은 자궁암 내력만 있어서 자궁암에 대한 게 많이 필요해요" 라고 하는 겁니다?
일단 난요,
난 어디든 가요.
몸안의 핏줄로드, 림프로드 뭐든 타고 날라다니죠.
자궁구역에 내가 깃발을 꽂으면
난 대장, 위, 간, 폐, 뇌까지 단숨에 갈수 있습니다.
걍 귀찮은 애들은 어디 좀 머물기도 하고
구역확장도 안하지만
나처럼 잠시도 쉬지 않는 유형이면
걍 내달리죠.
난 이 설계사가
잠을 아주 적게 잔 날 태어났습니다.
이 사람이 잠이 아주 모자르고
음식도 짜고 단것만 먹은 날
난 너무 신이 났습니다.
짜고 단 것들이
내 몸을 근육질로 불쑥 불쑥 키워주고
내 분신들이 구역을 넓혀갔거든요.
근데 그렇게 키워놓은 걸
근육운동 화염방사기로
잿더미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꾸준한 화염방사기는
나같은 암세포에겐 쥐약입니다.
이 설계사도 그렇지만
사람이란 존재에는
30조가 넘는 세포들이 있어요.
그 사이에서
나는 매일 태어나고 매일 죽습니다.
안 죽고 살아남아 구역을 넓히는 것이
내 목표이자 존재의 이유입니다.
난 설계사를 해꼬지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내 존재가
영역을 확장하고 널리 퍼져가는 것 뿐입니다.
사람의 몸이란게 참 나약하게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내가
똘똘 뭉쳐 만든 영역때문에
숨을 못쉬게 된다네요.
그래서 나만 보면 그렇게 죽이려듭니다.
날 도려내도
내가 또 태어날까봐
핵무기를 쏘잖아요. 방사선.
독하디 독한 약도 배포합니다. 몸 전체에.
엄청난 돈을 들여서 말이죠.
이 설계사가 가입한 암치료비보험이란게
나와 어떤 대결을 할수 있을지
참 궁금했어요.
10월 지금 가입했으니
내년 초에 건강검진을 한다더라구요?
중입자방사선, 걔 있잖아요
걔가 날 태워없애도
난 다른 구역에 분신을 만들어 놓고
나중에 또 까꿍을 할수 있어요.
이걸 암환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거라고 하더라구요.
아주 극성맞은 생명력인 내가
어떻게 해서든 사람 몸 속에서 살아남아
영역을 확장하려는 몸부림을 치는 걸
전이와 재발이라는
아주 건조한 단어로 표현하더군요.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난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화염방사기는 나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난 T세포와 결투 끝에 졌습니다.
나랑 같은 세포 주제에
자기가 아는 애 아니면 다 처단해요.
면역세포들이란..
난 만신창이가 되어 소멸되는 중입니다.
이놈의 T세포들은 날 귀신같이 찾아내요.
뭐 아프진 않아요.
그냥 매일 태어나고 매일 죽는게
지겨울 뿐이죠.
설계사가 가입한 암치료비보험이
돈만 아깝게 나가고
쓸일이 전혀 없는게
사람 입장에서는 제일 좋은 거겠죠?
내가 매일 태어나고 죽는 걸 반복하는 게
이 설계사가 꿈꾸는 가장 행복한 미래겠죠?
난 지금 죽습니다만
내일 또 태어납니다.
화염포같은 근육운동과
T면역세포들을 잘 피하면
언젠가는 중입자방사선과 싸울 일이 생길까요?
극성이라 미안합니다.
계속 다시 태어나서 미안합니다.
난 30조가 넘는 세포 중 하나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