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마시기로 했습니다
한 해가 다 가기 전 내가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은 건강검진이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이 몰리니 제발 좀 빨리 병원을 예약해 검진받으라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간절한 문자 메시지에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해가 갈수록 부쩍 체력이 안 좋은 것이, 물론 나이 탓이 크겠지만 병을 키우는 건 아닐지 싶은 생각에 서둘러 병원을 예약했다. 어떤 검사를 하는지에 따라 소요 시간이 다르겠지만 조금 빨리 검진을 마치려면 문진표를 미리 작성하는 게 좋겠다 싶었는데 해당 병원에서는 방문해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내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문항들로 가득 찬 종이 여러 장을 받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중 음주 평가 문항이 있었는데 꽤 자세하게 물어보는 바람에 기억을 더듬어 가며 답변했다. 술을 마시는 횟수에 관한 질문에서 어떤 달은 한 달에 2~4번 정도였던 거 같기도 하고 어떤 달은 일주일에 2번은 마신 거 같고, 와인을 몇 잔이나 마셨는지, 과하게 마신 게 1년에 몇 번이나 되었는지, 술 마시고 후회한 적이 있는지(있나?) 등 나름 정확하게 답변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는? 2주 정도가 지나서 받은 결과지에는 음주 생활 습관 평가 점수가 3점이었고 내 음주 상태는 위험 음주 수준이었다. 진짜요? 현재 음주 관련 신체적 합병증은 없지만, 적절 음주 기준 이내로 음주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다. 적절한 음주 기준이란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알코올 섭취는 그 자체로 전혀 득이 될 게 없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정의한 알코올이란 사람을 의존적으로 만들 수 있고 신체적/정신적으로 위험한 물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사회생활의 일환으로 그리고 일상의 긴장을 잠시 내려놓고 싶거나 또는 축하하려고 아니면 그냥 순수한(?) 호기심 등으로 술을 마신다.
사람마다 알코올이 신체 또는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다를 수 있는데 얼마나 많이 마시는지, 얼마나 자주 마시는지, 나이, 건강 상태, 가족력 등이 영향을 주는 요인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번에 많이 마시는 것과 매일 조금씩 마시는 것 중 어느 게 더 해로울지. 나는 이 단순하고 일차원적 질문에 답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당연히 둘 다 안 좋겠지) 그래도 ‘좀 더 해로운 쪽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좀처럼 멈출 수 없다. 간이 건강하다는 조건으로 제대로 회복하려면 72시간이 필요하다 하니 매일 마시는 것이 간에 무리를 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면 한 번에 많이 마시는 편이 나은가? 이것도 아니다. 인사불성인 상태가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와 시비가 붙을 수도 있고 음주 운전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생각보다 그 위험성은 크다.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 프랑스 사람들이 다른 국가 사람들 못지않게 기름진 음식을 섭취하지만, 심장병에는 덜 걸린다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이에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원인을 레드 와인으로 보고했다. 여러 요인의 상관관계를 조사해 보니 와인 소비량이 많은 나라일수록 허혈성 심장병 사망률이 낮았다고 한다. WHO가 앞장서 진행한 프로젝트이자 20여 개가 넘는 국가가 참여한 연구였고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그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하루에 레드 와인 1잔 정도는 건강에 좋다는 설. 실제로 와인은 폴리페놀(Polyphenol)이나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과 같이 항산화 작용을 하는 물질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률과의 연관성을 본 연구이기에 알코올 자체로 인한 병이나 사고로 죽음을 이르게 하는 경우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침을 사용한 간단한 유전자 검사를 통해 내게 알코올 분해 능력이 있는지도 알아볼 수 있다. 알코올이 분해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술을 마시게 되면 ADH 효소가 체내의 알코올을 아세트알데히드(acetaldehyde) 물질로 분해한다. 이는 유독성 물질이며 대부분 ALDH2 효소가 분해를 담당한다. 이외에도 몇 가지 효소가 아세트알데히드 물질을 처리해 결국 우리가 숨을 쉬거나 소변을 보면서 배출된다.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것은 ADH 효소가 활성화되면서 아세트알데히드 생성으로 이어지고 이게 독성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세트알데히드 물질은 WHO가 규정한 1등급 발암 물질이기도 해 암이나 알코올성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알코올 분해 능력이 우수한 사람은 이 독성 물질을 분해할 수 있는 ALDH2 효소의 작용이 강하다. 이는 똑같은 양을 마셨을 때 덜 취한다는 것이지 많이 마셔도 몸에 무리가 전혀 가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
올해 여름에 본 영화 중 “Another Round (어나더 라운드 2022, 덴마크)”가 갑작스레 떠오른다. ‘술이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친구들의 셀프 음주 실험을 내용으로 삼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혈중알코올농도 0.05%면 행복하고 창의적이다.’라는 가설을 입증하려 한다. 술의 장단점과 술로 인한 우리네 인생사의 희극과 비극이 한군데 버무려진 영화로 ‘알코올’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해보게 한다.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불러오는 알코올.
갓 잡은 생선처럼 파닥거리던 20대에는 내가 술을 마시는지 술이 나를 마시는지 모를 정도로 마셔도 몸은 금방 회복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내 몸은 많은 술을 (잘) 받아들일 수 없었고 몸은 쉬이 지치고 피곤했다. 그래서 딱 한 잔에도 술기운이 올라 알딸딸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도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러면 잠을 더 푹 잘 수 있지 않을까? 이게 나의 마지막 궁금증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술의 진정 효과로 인해 금방 잠은 들 수 있지만 중간에 깨거나 하면서 수면 주기를 방해해 수면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전에 습관적으로 술을 마신다면 만성 질환에 노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불면증이나 수면 무호흡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마시자 매거진>에 기고한 글입니다.
곧 2024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