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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재 Jun 18. 2023

불안하기 좋아하는 사람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1

고독이란 어쩌면
달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출신 수의과 커플, 슬로바키아 토박이 성인 남성 세 명 그리고 나. 여섯 명이 함께 지내는 여관은 가끔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문제는 언어였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같은 모국어를 가진 친구가 나만 없었다. 티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우울함은 가시지 않았다.



성을 다시 짓는 일은 두 말할 것 없이 보람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과를 할 때면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것은 분명 어떤 종류의 불안에서 오는 외로움이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 회의감 때문일까. 생각만큼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 그래서 내 선택에 대해 자책해서 그런 거였을까.



"(...) 정말 고민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야. 뭐가 급한 것인지 제대로 된 판단도 못하고, 순진하리만큼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해. 저들의 영혼 말이야. 만인이 인정하는 고민거리를 발견할 때까지 절대 편해지지를 못해. 그리고 찾아내면 그다음에는 또 그에 맞춘 표정을 지어 보이지. 불안하다는 얼굴 말이야. (...) 알고 있으면서 또 그것 때문에 고민하게 되는 거야. (...)"
- <길 위에서>, 잭 케루악



비트 세대의 대명사 잭 케루악의 자전적 소설, '길 위에서On the Road'의 한 페이지를 인용했다. 어쩌면 나는 불안 중독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떠난 여행 한가운데에서도 고민은 날 놓아주지 않더라. 



불안이란 내게 가장
욕지기하는 원동력이다.



출국 전 집어든 단 세 권의 책 중 한 권은 바로 작가 허지웅의 산문집 '살고 싶다는 농담'이다. 허지웅 작가가 짧게 소개한 니체의 철학은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와 '영원회귀;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은 그가 소개한 니체주의 철학의 두 가지 핵심이다. 



환상처럼 행복한 일도, 찢어지듯 불행한 일도 모두 영원히 반복되는 자기 인생의 단편들이기에 모두 사랑해 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일한 것이 반복될지라도 그것마저 자기 인생이므로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의 철학을 회의주의적이고 염세주의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인생을 불행하게 바라보는 것이 어쩌면 가장 효과적인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싶을 때마다 찾았던 장소가 있다. 성 옆의 언덕에 올라 해 질 녘 풍경에 어우러진 자연과 동화된 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는 것. 노후에 휴양할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이곳을 선택하고 싶었다.



언덕 위에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지는 태양 바라보며.



티모시 살라메Timothée Chalamet의 역작 '콜미바이유어네임Call me by your name'은 80년대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부귀한 가족의 모습을 잘 담고 있는 영화이다. 



옷을 가볍게 걸치고 밖을 나선다. 
투박한 자전거 위에 무심하게 쌓인
먼지를 탁탁 걸레로 닦아낸다.
돌길이 영역다툼에서 포장도로에게
패배한 80년대, 모던한 선글라스를
쓴 채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갱지에 찍힌 얇은 칸트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둘.
시내에서 돌아와서는 배구와
수영을 즐긴다. 



멋들어지고 아름다운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항상 이런 꿈을 마음 한켠에 가지고 살아왔다.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은 어쩌면 영화같은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스클라비나 성의 주말은
생각 외로 분주했다.



바쁜 일손을 돕기 위해 주말마다 성에 방문하는 소년을 만날 수 있었다. 안드레이Andrej는 아직 고등학교 1학년 소년인데도 불구하고 4개 국어에 능통했다. 모국어인 슬로바키아어, 옆나라 언어인 체코어, 만국공용어인 영어,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여자친구와 교제하면서 배운 불어까지. 대단한 역량이 아닐 수 없었다.



안드레이의 역할은 스클라비나 성의 역사를 전시해 놓은 작은 박물관을 가이드하는 것이었다. 슬로바키아어로도, 영어로도, 심지어는 불어나 체코어로도(!) 박물관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그를 예뻐하지 않을 어른은 없을 것이다. 



일과가 끝나고 안드레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내가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 갈 계획이 있다고 하니 브라티슬라바에 놀러 오면 꼭 연락하라는 말과 함께 연락처를 교환했다.



어느덧 스클라비나 성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다. 쏜살같이 지난 8일 동안의 경험은 후회하지 않을 선택으로 남았다. 



동유럽의 아름다움을 조금 더 느낄 수 있는 목적지를 찾고 있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부다페스트와 빈에 들리지 않고서는 동유럽을 갔다 왔다고 할 수 없겠더라. 곧장 배낭을 들쳐 매고 부다페스트행 기차표를 검색했다.



우물 밖 세상 유럽 편 #011 - 마침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가명이며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Creative Commons, CC)에 따른 본문의 인용을 허락합니다.

원저작물의 저작권은 브런치스토리 작가 권민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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