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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 같은 연인

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2

by 권민재

꽃다운 청춘이 원인 모를 우울감에 젖어 시들어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미칠 듯이 우울한 걸까?"



어느 날 부랄친구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조금은 심오한 주제를 던져봤다. 녀석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얘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했다. 이 뭣 같은 우울감을 나만이 느끼는 건 아닐 터였다.



"야, 그건 네가 연애를 안 해봐서 그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네가 아직 잘 모르는 거지."



우스갯소리로 던진 친구의 말은 다른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제대로된 연애 한 번 해보지 않은 나조차도 그 말에 동의했다. 남녀 간의 사랑이 뭔지 잘 모르는 나였지만 짝사랑만은 지겹도록 해온 나였다. 언젠가 아주 우울할 때,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을 꽉 안을 수만 있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질 거라 믿었다.



누군가를 껴안을 수 있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다.



가장 위로가 되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꼬옥 껴안았을 때'라고 대답한다. 누군가를 마음 깊이 위로해주고 싶을 때 내가 항상 하는 행동이다.



그녀가 내게 그런 사람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고자 하는 사이. 그런 사이를 일컫는 정해진 말은 없지만, 절친과 연인의 특징을 섞어놓은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절친이자 연인이라고 부른다. 어떤 이야기이든 하고 싶고, 무슨 이야기이든 들어주고 싶은 사이. 그러면서도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소홀히 하지 않는 건강한 관계. 말하자면 그런 거다.






하루는 런던에서 다툼의 조짐이 보였다. 그날의 우리는 모두 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였다. 프랑스 니스에서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갔어야 할 어느 날에 파리에는 심한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것이 기차 운행 정지로 이어져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 마르세유에 최소한 24시간을 체류했다. 낙오된 그날의 기억은 우리 모두에게 심한 스트레스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나를 향한 그녀의 가시 돋친 말투가 신경 쓰였다. 잠시 대화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그녀가 내뱉은 한 마디였다.



"왜 이렇게 내 말을 듣질 않는 거야? 그냥 좀 날 따라와, 내가 길을 안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잡은 그녀의 손을 당기며 그녀를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말했다.



"네 말을 듣지 않는 게 아냐. 단지 둘러볼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내게 무언가를 강요하기보다 나를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해.' 그녀에게 재차 강조한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고 친밀한 사람일수록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한국의 한 장수 힙합 그룹의 일화가 있다. 두 명으로 이루어진 그 그룹이 한 방송에 출연했다. 둘과 방송을 처음으로 함께 진행한 관계자는 '그들이 서로에게 굉장히 조심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함께 오래 지낸 사이임에도 불고하고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서로를 그만큼 배려하고 존중해 왔기 때문에 장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녀와 내가 50일 동안의 배낭여행을 무탈하게 매듭지을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사다난했던 여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는 서로에게 자부심을 느꼈다. 함께라면 무엇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벅차오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절친이자 연인으로 남아있다.



카라멜 남자, 화이트 초콜릿 여자 002 - 마침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각색되었습니다.

원저작물의 저작권은 브런치스토리 작가 권민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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