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막론하고 사회를 대변하는 예술적 양식이 존재한다. 시대정신이 변하면 기존의 양식은 새로운 양식의 자양분이 되거나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타파할 구습이 된다. 이러한 흐름은 건강한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1900년 무렵, 서양에서는 타이포그래피 양식과 그에 따른 원칙이 정립되고 확산되었다. 대칭과 세리프 활자를 상징으로 하는 전통적 타이포그래피 양식이 다듬어졌고 비대칭과 산세리프 활자를 상징으로 하는 신 타이포그래피 양식이 나타났다. 읽기 편한 글을 제공하는 것을 본질로 여겼던 전통적 타이포그래피에서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습을 유지했고,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한 신 타이포그래피에서는 당시의 시대정신(모더니즘)과 잘 맞물려 타이포그래피와 시각 문화에 혁신을 일으켰다.
1990년 무렵, 국내에서는 한글 창제 이후 유지해 온 세로짜기 대신 가로짜기를 기본으로 하는 시각 문화가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고,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환경은 이를 더욱 공고하게 했다. 급격한 사회적·환경적 변화는 기존 활자와 활자 문화의 변화를 요구했고, 그에 따라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한글 타이포그래피가 필요했다. 이때 국내에 소개된 얀 치홀트(Jan Tschichold)의 『신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 1928)』는 하나의 모범 답안이었다. 한글 타이포그래피 양식이나 원칙이 정립되지 않았던 때에 ‘선언’처럼 명료한 규칙을 제시한 『신 타이포그래피』는 매력적이었고 그 모습 또한 신선했다. 그에 비해 타이포그래피의 전통적 양식과 원칙을 담은 스탠리 모리슨의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은 얀 치홀트의 『신 타이포그래피』와 비슷한 시기인 1930년에 발표되고, 1936년에 책으로 출판되었지만,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신 타이포그래피가 유입된 지 30년 정도 지난 지금, 이에 대해서 특별히 논의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신 타이포그래피의 규칙은 이미 한글 타이포그래피 속에 녹아든 듯하다. 하지만 아직도 한글 타이포그래피 규칙이나 원칙은 ‘선언’되거나 ‘출판’된 적이 없다. 단지 우리는 신 타이포그래피 규칙에 맞춰 한글 활자를 운용하고, 활자체를 개발하고 있을 뿐이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지금은 신 타이포그래피의 시대정신을 기억하고 따르기보다는 그저 ‘스타일’만을 따르는지도 모르겠다.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양에서는 전통적 타이포그래피와 신 타이포그래피 사이의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긴 글을 읽을 때와 눈에 잘 띄어야 할 때, 쓰임과 상황 등 다양한 조건에 따라 두 양식을 선택하여 활용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러한 경계를 넘나드는 양식까지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우리는 신 타이포그래피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는지, 신 타이포그래피 발생 이후의 유럽 상황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관념적으로 읽기 편한 조판과 실증적으로 읽기 편한 조판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를 하지 못했다. 단지 신 타이포그래피 양식을 좇으며, 읽기 편한 글을 조판할 때에는 개개인의 역량으로 풀어내거나, 오래된 출판사 같은 곳에서는 선배 세대가 쌓아온 조판 노하우 후배에게 전수하면서 해결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공고해진 디지털 환경과 세대의 변화 속에서 읽기 편한 글을 조판하는 방법이나 조형 판단 기준은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담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타이포그래피를 단순히 ‘스타일’로만 이해하고, 목적에 따라 활자의 선택에서 운용 방식까지 달라진다는 본질을 간과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에 대해 말했던 스탠리 모리슨의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다. 우리는 읽기 편한 조판을 위한 타이포그래피 원칙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신 타이포그래피를 받아들였던 때처럼 스탠리 모리슨이 제시한 ‘읽기 편한 타이포그래피’ 원칙을 깊이 관찰하고 한글에 맞춰 활자를 선택하고 운용해 볼 수 있다. 모리슨의 원칙을 한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를 나열하고 시대 변화에 맞춰 새롭게 고려해야 할 요소를 더해볼 수도 있다. 이를 통해서 읽기 편한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원칙을 세우게 될지도 모른다. 이미 원칙이라는 경계 바깥의 자유를 얻은 시대에 이제 와서 원칙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시대를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칙이 필요하다면, 늦었을지라도 풀지 않은 숙제를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글 타이포그래피와 시각 문화 안에 있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얀 치홀트의 『신 타이포그래피』와 스탠리 모리슨의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이라는 상반된 두 책은 한글 타이포그래피 원칙을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이 제시한 타이포그래피 규칙과 원칙의 시대적 배경과 장점 그리고 역할을 제대로 이해한 뒤에, 한글에 적합한 지금의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원칙을 논의해 본다면 어떨까. 우리는 늘 서양의 디자인과 문화를 따르면서 흥미진진한 새로운 양식과 형태에 몰입했을 뿐, 그들이 어떠한 과정으로 지금에 도달했는지 살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양의 전통적 타이포그래피 원칙이 늦게나마 소개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경험과 지식을 겸비하고 시대를 통찰한 디자이너가 이 시대의 한글 타이포그래피 원칙을 선언하는 날을 기다려 본다.
[윗글은 스탠리 모리슨의 『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안그라픽스. 2020)에 실린 글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읽으면 좋은 책::
스탠리 모리슨,『타이포그래피 첫 원칙』(안그라픽스. 2020)
얀 치홀트,『타이포그래픽 디자인』(안그라픽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