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 스캔들> 속의 진짜
고등학생 딸은 둔 엄마가 보는 예사롭지 않은 드라마
비록 허구이긴 하나 현실과 시대를 반영한 콘텐츠로 드라마만 한 게 또 있을까요? 사람들 입에 수없이 오르내리고 각종 패러디가 쏟아져 나와도 막상 시간을 내서 드라마 한 편을 보기란 꽤나 큰 결심이 필요합니다(한 번 빠지면 정신 못 차리... 먼산). 우리 집 두 딸들은 로맨스 빠진 드라마는 정중히 사절이라 저와 취향이 꼭 맞는다고 보긴 어렵지만, 작은 아이가 강력 추천한 드라마 <일타 스캔들>을 보고, 요즘 말로 '이거 찐이네' 싶었던 것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합니다.
1회, 첫 장면. 학원 끝날 시간에 맞춰 주변에 정차한 차들로 도로가 막히니 우회하라는 라디오 소리, 진짜 그렇습니다. 도로가 몇 차선인지는 무관합니다. 한 개 차선을 당당히 점거하며, 줄줄이 서 있는 차들이 쏟아내는 반짝반짝 비상 라이트는 동네의 학구열을 반증하는 하나의 지표니 말입니다.
일타 강사의 현장 강의를 듣기 위해 학원 등록 대기표를 받으러 미라클 모닝을 시현하고 댓바람에 달리기를 한 적은 없지만... 주변 고등학교의 내신 문제 적중률이 뛰어난 강사를 쫓아 학원을 옮겨 다니거나 일타 강사 마감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 심지어 학생들이 빠지지 않아 대기를 걸어야 할 지경이라는 것 등은 현실 기반의 찐 스토리입니다.
학교 교실, 선생님 수업 시간에 버젓이 학원 숙제를 꺼내 들고 아무렇지 않게 숙제하는 학생이 한 반에 서너 명씩 꼭 있습니다. 드라마에선 그런 아이가 무려 전교 1등이라는 설정인데... 요건 아니라고 봐요. 전교 1등은 학교 수업을 누구보다 열심히 듣거든요. 그나저나 꾸벅꾸벅 조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엎드려 자는 건 용서 못 한다는 학원 강사의 진심, 시그니처 발차기로 학생들 잠을 깨우는 드라마 속 일타 수학 강사는 '메가 공부'의 현○○ 강사가 모델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사교육 없이 고1은 어떻게 버텼는데 고2가 되니 내 힘만으론 역부족이라고, 특히 수학은 안 되겠다고 엄마(실은 이모)에게 학원 보내달라는 얘길 어렵게 꺼내는 기특한 딸(실은 조카), 남해이의 발언은 진짜입니다. 밥 먹고 수학 문제만 푸는 학원 강사도 끙끙거리며 겨우 풀 수 있는 문제를 수능의 킬러 문제라고 하고 있으니... 한 문제 푸는 데 족히 20분은 걸리는 킬러 문제를 서너 개씩 넣은 우리나라의 수능. 대학의 서열이 만들어 낸, 시험을 선발의 도구로만 기능하게 한, 복잡한 계산을 여전히 손으로 풀며 실수 하나에 등급이 오르락내리락, 누구는 찍어서 맞았다며 운 따라 등급이 결정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현실. 드라마라고 해도 믿기 어렵죠.
반찬가게를 운영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이모에게 다른 집 엄마들처럼 픽업을 해달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뿐인가요. 학원 하나 보내달라는 것도 여러 번 망설이는 착한 딸이 남해이 입니다. 시키지 않아도 소파에 걷어놓은 빨래를 개고, 삼촌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주문 배달까지 하는 걸 보면서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 딸은 현실에 없으니까요.
정신없이 하루하루 바쁘게 사는 엄마에게 수행평가를 대신 해달라는 말 같은 건 언감생심입니다. 밤늦게까지 손수 바느질해서 손목 쿠션을 완성하는 남해이, 다음날 학생들의 수행 결과물을 보며 "어느 세탁소가 이렇게 솜씨가 좋아?", "엄마가 해주셨니?" 농담하는 선생님도 과제를 내긴 했지만 설마 이걸 아이들이 직접 만들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러니 수행평가가 성적의 변별 요소로 작용하는 걸 꺼릴 수밖에요. 외고에는 손목 쿠션 만들기 같은 수행평가가 없어서 참 다행이라고 말하는 큰딸. 공부(시험 관련)와 성적 말고는 별 의미 없다는 현실 고등학생의 삭막한 찐 반응입니다.
모의고사를 보고 온 딸에게 100점을 맞았냐고 묻는, '입시는 네가 알아서' 엄마가 있는가 하면, 전교 1등보다 전국 상위 몇 %에 드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입시 빠삭 돼지 엄마'도 등장합니다. 자녀의 공부를 위해 학원 정보를 알아보고, 일타 강사 현강을 위해 줄을 서고, 학원의 자리를 맡고, 등/하원 픽업을 하는 등 보이지 않는 부모의 서포트가 자녀의 성적과 무관하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부모의 경제력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전교 1등, 수아의 엄마, 일명 '수아임당'이란 닉네임을 가진 인플루언서 제안으로 학원에는 의대 준비반이 앞당겨 개설됩니다. 아무튼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다수가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니 이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현실 아닙니까?
학교 선생님보다 학원 선생님을, 학교 수업보다 학원 수업을 찐이라 여기는 요즘 학생들. 드라마가 보여주는 현실이 과장이 아닌 부분이 많아 씁쓸합니다. 여태껏 자신의 힘으로 공부해 왔던 남해이가 만약 일타 강사의 도움으로 1등을 찍는다면... 그건 결코 사교육의 힘만은 아닐 겁니다.
자기주도력은 자신의 노력으로 달성 가능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메울지,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좋을지, 공부 방법을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무엇이 더 중요하고 급한지 따져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그걸 직접 실행에 옮기고, 수정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쌓여서 발휘되는 힘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