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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Feb 12. 2022

갑자기 찾아온 우울(24~27주)

나의 첫 임신 이야기

24주가 넘어가면서, 코 끝에 스치는 바람이 어제와는 다른 것을 느끼는 계절이 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팔을 입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아침의 공기는 가을 냄새가 났다. 왠지 쓸쓸한 느낌이 나는 그 냄새를 맡으니 긴긴 여름동안 별스럽지 않았던 마음이 콩 하고 작게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괜히 어제까지 잘 입던 배가 펑펑한 원피스보다는 따뜻한 분홍색이나 노란 스웨터를 꺼내보고 싶어졌다. 하루 10분 이내 산책제한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은 동네 뿐이었지만, 창 밖으로 매일 달라지는 나무의 색깔들이 자꾸 나를 밖으로 부르는 것만 같았다. 성격검사를 할 때마다 압도적인 외향형으로 나오는 나에게 이 계절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별로 꼭 해야하는 것이나 꼭 사야하는 것이 아닌데도 집 밖에 나가 계절을 느끼고 싶어서 안달하는 하루하루가 시작되었다.


그 때부터 내 감정이 조절되지 않기 시작한 것 같다. 열심히 짜던 아기 담요가 완성되고 나자 열정적인 취미였던 뜨개질도 어깨만 아프게 하는 귀찮은 일처럼 느껴지고, 내가 집에서 하는 모든 일이 별로 쓸모없게 느껴졌다. 글도 잘 써지지 않았고, 창의적인 생각도 들지 않아서 별 생각없이 티비를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좋아하던 책을 다시 읽으려고 해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고, 지난 번 정기검진 때 들었던 전치태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자꾸 떠올랐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화할 상대가 없으니 엄마에게 전화해서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빈도가 늘어났고, 늘 외롭다고 생각하다보니 남편의 퇴근이 조금만 늦어져도 화가 났다. 결국 내가 좀 이상해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는 결국 남편과 대화하다가 갑자기 울음이 터지면서였다. 남편은 그저 피곤했을 뿐이고, 나는 넘치는 에너지를 온갖 대화로 풀고싶었을 뿐인데 남편이 나를 귀찮아하고 짐으로 여긴다는 생각이 들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이 서러워졌다. 그것도 남편이 잠든 후에 혼자 울음이 터져서는 밤새도록 눈물이 그치질 않아 혼자 앉아서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다음 날 아침부터 남편은 영문도 모른채 나의 분노와 짜증을 마주해야 했고, 점심이 되어서야 나는 내 감정이 임신 중 우울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코로나19 시대에 우울을 겪는 임신부에게는 애석하게도 할 수 있는 활동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각종 상담이나 태교 클래스는 모두 문을 닫았고, 멀리 사는 친한 친구들을 부르기도 미안했다. 고위험 임신부인 나는 사는 지역을 크게 벗어날 수도 없었고 차를 오래 타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보러 갈 수도 없었다. 삶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의욕이 없어지면서 입덧이 끝나고 타오르던 요리 욕구도 함께 사라졌다. 식욕도 그닥 없어서 배가 너무 고파져야만 빵이나 우유를 챙겨먹었고, 저녁엔 남편 주도 하에 배달을 시켜먹곤 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친정 엄마가 자주 오시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와서 냉장고를 가득 채워주고 가거나, 음식을 해서 같이 먹고 가시곤 했다. 남편은 주말마다 사람이 없는 한적하고 예쁜 카페를 찾아다니며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다. 그럼에도 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커지는 배와, 근육이 사라져서 지는 내 몸이 적응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것만 같은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25주차 정기검진일이 왔다. 그 동안 배가 제법 임신부처럼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체중 증가는 많지 않은 편이었다. 임신 전 보약을 먹기 전과 비교했을 때 6키로 정도가 늘었고, 임신 직전과 비교했을 때는 3키로도 채 늘지 않은 몸무게였다. 25주 정기검진에는 임신부의 3대 관문인 임신성 당뇨 검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몸무게가 급격하게 늘지 않으면 임신성 당뇨의 확률이 낮은 편이긴 하다. 그럼에도 한참 우울한 사고회로가 흘러가던 나는 전치태반인데 임신성 당뇨까지 나올까봐 조금 긴장이 되었다. 그 날따라 외래 환자가 많았고, 임신성 당뇨 시약을 먹고 진료실 앞에 앉아 혈액검사 시간을 기다리던 나는 구역질을 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괜히 불안했지만 그래도 결과만 좋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임신성 당뇨 검사는 금식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고, 50gm의 당분 시약을 먹고 1시간 후 혈액검사로 혈당을 체크해서 140이상이 나오면 2차 검사를 하게 된다. 그 아래로 나오면 당뇨 가능성이 낮아 재검을 하지 않는다. 외래에 앉아있다가 겨우 혈액검사실로 내려가서 시간 맞춰 피를 뽑고, 다시 시장통같은 외래로 돌아와 초음파를 보았다. 다행히, 집가는 길에 문자로 받은 결과는 정상이었다. 이 날 처음으로 초음파를 보면서 아기가 얼굴을 눈코입이 보이게 모두 보여줬고, 너무 작고 귀엽게 움직이고 있어서 그 날의 긴 대기와 검사 과정의 괴로움이 모두 잊혀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아기 크기는 표준에 가까웠지만, 브이라인이 선명하고 아직은 너무 말라 있었다. 단백질을 잘 챙겨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철분제와 영양제를 모두 잘 먹고 있는지를 물어보셨다. 식욕이 없어도 아기를 위해 챙겨먹어야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조금 반성하게 되었다.


26주를 거쳐 27주로 가는 동안 몸은 초기와 달리 눈에 크게 띄는 변화가 많아졌다. 교과서적으로 동그랗게 나오는 배는 당연한 일이었고, 배꼽을 중앙으로 해서 임신선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측했지만, ‘임신’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깔끔하고 예쁜 배를 상상했지 내가 거울로 보는 모습이 현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겨드랑이가 어두운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얼굴 여기 저기가 붉게 변하고 이상한 곳에 뾰루지가 나기도 했다. 피부가 너무 건조해서 임신부 오일과 튼살크림, 고보습 크림을 모두 사용해도 피부가 여기 저기 간지러웠다. 잠결에 이런 곳을 긁거나 잘못 만져서 상처가 나버리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렇게 난 상처가 잘 낫질 않고 붉게 흔적이 남아있었다. 여기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변화의 화룡점정은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나는 평생 머리숱이 많은 여자로 살았고, 단지 미용실을 가거나 머리를 손질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늘 긴생머리 스타일로 살아왔다. 그런데 머리가 긴 만큼 머리카락이 빠지는 효과가 드라마틱했다. 내가 지나다니는 곳마다 징그러울 정도로 머리카락이 많이 떨어졌고, 머리를 묶으려고 머리카락을 한 손에 쥐면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숱이 줄어들었다. 평생 세일하는 샴푸를 아무거나 써왔던 나는 임신부 탈모 샴푸를 검색했고, 평소 사던 샴푸와 비교하면 말도 안되는 가격에 수십번을 고민하면서 임신부 천연 샴푸를 샀다. 그렇지만 그 샴푸도 계속해서 빠지는 머리카락을 막아주진 못했으며, 나는 다음으로 두피에 좋다는 린스바를 샀다. 하지만 그 어떤 것들도 호르몬의 강한 힘을 이기기는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몸도 마음도 뜻대로 되지 않는 날들 사이에, 나와 남편은 큰 결심을 하고 태어날 아기에게 방을 줄 수 있는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과정에서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이 많았고, 작은 것 하나도 크게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마음 졸였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사를 하고, 내가 고른 벽지와 조명, 새로운 테이블에 앉아 새 집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보고 있자 마음에 긍정적인 변화가 느껴졌다. 원래 살고있던 집은 시티뷰를 자랑하는 고층이었는데, 새로 이사온 집은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가 보이는 저층 세대였다. 집에 홀로 앉아있는 시간이 많은 것은 여전했지만, 창문을 살짝만 열어두어도 오후 3-4시가 되면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어왔고,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우리 집 거실까지 닿은 나무의 아름답게 변한 잎사귀가 흔들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매일 그 시간쯤 온 집안을 환기하면서 책을 읽거나, 신나게 노는 동네 아이들을 구경하곤 했다. 땅과 사람이 보이고,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나무들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전에 살던 집보다 상가가 멀고, 대형 서점이나 프랜차이즈 카페도 없지만 이상한 안정감이 있는 동네였다. 걸어서 10분 이내에 개발이 되지 않은 커다란 하천도 있었는데, 날이 좋은 날 남편과 손을 잡고 하천 위 다리에 서서 야생 상태의 풀숲과 떠가는 구름을 보고 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새 동네 근처에는 새로 오픈한 큰 공원도 있었는데, 주말이 되면 걷지는 못해도 따뜻한 걸 한잔씩 들고 벤치에 앉아 가족 단위로 놀러온 사람들을 한참 구경하다 오곤 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아이들이 유난히 많아서, 공원에도 아이를 데리고 놀러나온 어른들이 많았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부터 조잘조잘 떠드는 아이들, 아빠에게 자전거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 아빠를 놀이기구로 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남편과 나는 우리의 미래 모습이라며 웃곤 했다. 그 모습이 평화로웠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행복해보여서 나의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가을 햇살이 피부에는 안 좋을지 몰라도, 나에게 매일 찾아오던 가을 햇살과 그 아래 각자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우울에서 벗어나는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그렇게 우울이 모두 끝나거나 불안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마음을 인지하고 조금씩 그것을 조절하는 방법을 알게된 것은 적어도 나와 남편 모두의 평화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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