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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Mar 30. 2022

조리원 라이프

나의 첫 임신 이야기

다소 극적이었던 나의 출산과 일주일간의 입원은 정신없이 지나갔고, 그래도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아기를 카시트에 태워 산후조리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있을 때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면, 산후조리원에 와서는 그동안 사소하게 느껴졌던 몸의 불편감과 남들보다 느린 회복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그것도 정말 힘든 고비가 넘어갔기 때문에 들 수 있는 생각이었겠지만, 조리원에 와서야 긴장이 풀리고 온몸에 든 멍과 상처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당장 오늘 저녁, 내일 아침의 검사 결과를 걱정하던 시간이 지나가자 앞으로 아기와 살아갈 나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생겼다. 아기를 낳기 전에 막연히 아기용품을 쌓아두고 생각하던 것과, 울고 먹고 잠드는 아기를 보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구체적인 면에서 꽤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나는 집과 가까운 조리원을 선택했기 때문에 병원과는 거리가 꽤 있었고, 아기와 함께 졸면서 조리원에 도착한 나는 그날 입소한 산모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입실하게 되었다. 같은 날 입실한 산모들을 모아서 유축기 사용법과 기본적인 아기 돌보는 법을 설명한 후 조리원의 시설과 시스템을 알려주는 입실 교육이 있었는데, 내가 가장 늦었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부랴부랴 입실 교육에 참여했다. 문제는 내 몸상태가 다른 산모들처럼 씩씩하게 조리원 투어를 따라갈 만큼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복대를 차고도 잠시 서서 설명을 듣는 것이 힘들어 휘청이고,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는 최선을 다해 걸어도 저 멀리 앞서가는 산모들의 뒷모습을 봐야만 했다. 길지도 않은 입실 교육 때 들은 것들이 그래서 잘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겨우 교육이 끝나고 방으로 오자마자, 콜벨이 울리더니 가슴 마사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입실한 날은 토요일이었는데, 토요일은 마사지사들도 일찍 퇴근해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입실자인 나를 다급하게 불렀던 것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울혈 된 가슴은 풀리지 못한 채 사용법도 제대로 모르고 유축기만 사용해대서 손만 대도 아프기만 했다. 뭔지도 모르고 유선 뚫는 마사지를 당한 나로서는 소리도 못지를 정도로 갑작스러운 고통이었지만, 잠깐의 마사지를 하고 나자 드디어 유즙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양은 적었지만, 초유를 아기에게 먹이겠다는 생각과 다시 가슴이 굳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3~4시간마다 유축을 시작했다. 나의 아기는 이미 병원을 나올 때부터 한 번 먹는 양이 80cc인 아기였기 때문에 직접 수유는 욕심도 내지 않았고, 유축량은 20cc를 채 넘지 못했다. 병원에 있을 때도 유축은 고통이었지만, 조리원에 와서 가슴 마사지를 받고 나면 유축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젖이 차오르는 동안에는 가슴이 서서히 울혈 되면서 아팠고, 유축할 때는 그 나름대로 기분이 나쁘고 싫었다. 조리원에서의 첫 24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당연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꽤 괜찮았던 기분도 점점 나빠져갔다.


남편은 병원에서 내가 유축기와 씨름을 할 때부터 분유로만 먹이자고 나를 설득했다. 모유수유로 고통받지 않아도 이미 남들보다 위험한 수술과 후유증으로 일주일 내내 통증을 호소하던 내가 조금 낫는 것처럼 보이자마자 가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게 힘들었던 것 같다. 사실 나도 완전 모유수유를 고집하려는 생각은 없었고, 나오는 대로 먹이다가 분유를 먹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해서 모유를 먹이려고 하진 않았다. 하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분유를 먹이는 것이 왠지 나쁜 엄마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죄책감이 들어서 최선을 다해 시도는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가짐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부터 시작된 통증 나아지지 않고, 유축량도 늘지 않으면서 잠까지 못 자고 시달리면서 첫날 새벽에 우두커니 앉아 단유를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다른 엄마들보다 회복이 늦고, 모유로 괴롭지 않아도 온몸 구석구석까지 들어있는 멍과 배에 가득 찬 피 때문에 몸을 일으키고 눕는 것마저 힘들었기 때문에 고통을 하나라도 줄여서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날이 밝자마자 조리원의 원장님을 찾아가 단유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원장님은 방으로 찾아와서 내가 겪은 출산의 과정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혈종과 빈혈 문제를 듣고 바로 엄마가 살아야 아기도 사는 것이라며 단유 스케줄을 짜주셨다. 단유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관점에 따라 선택의 여지가 있겠지만 나는 최대한 자연 단유를 선택하고 싶었다. 단유를 위해 산부인과 처방약을 먹으면 그 이후로 모유 수유가 불가능해진다는 점도 있었고, 가장 많이 처방하는 단유 목적의 의약품에 부작용이 상당하다는 점과 FDA에서 단유 목적으로는 해당 의약품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약을 복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원장님은 가슴을 시원하게 유지해주는 양배추 크림을 2시간마다 바르고, 매일 조금씩 유축 텀을 늘려서 젖이 차오르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모유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유축 전에 따뜻하게 마사지를 해서 혈류를 늘리는데, 반대의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일 산모를 위해 나오는 미역국을 피하고 보리차와 엿기름 물을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사실 식이요법에 대해서는 효능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내 경험으로는 보리차와 엿기름 물이 모유량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슴을 압박붕대로 묶어두라고 알려주셨다. 다행히 조리원이 약국이나 작은 마트가 가까운 곳에 있어서, 남편이 얼른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 주었다. 이렇게 단유를 시작하고 나자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이전보다 자주 유축하거나 모유량이 적은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게 되었지만, 왠지 열심히 유축하는 다른 산모들과 편하게 대화하기가 조금 어려워졌다. 조리원 산모들의 주 대화 주제는 유축과 아기 몸무게, 집에 가서 먹일 분유나 각종 육아 아이템 같은 것이었다. 일단 나는 유축 텀을 늘리고 모유량을 줄여야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모유량을 늘리고 아기를 자주 먹이려고 노력하는 산모들과 반대의 패턴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산모들의 오가는 대화만 듣고 있어도 죄책감이 들었고,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임신 기간 동안 전치태반 때문에 많은 활동이 제한되었던 나는 사실 조리원 생활을 많이 기대했다. 연고도 없는 동네에서 살면서 동네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함께 아이를 키우는 친구를 조리원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단유를 시작해서 대화 주제도 맞지 않았고, 조리원에 와서 긴장이 풀어지자 걷잡을 수 없이 잠이 쏟아져서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원장님이 내 몸 상태를 보면서 단유를 상담해 주실 때부터 수유 콜은 받지 말고 몸이 나아질 때까지 무조건 쉬라고 하셨는데, 사실 나는 그렇게 생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식당에 나가서 밥을 먹는 것조차 너무 힘들고 반찬 접시를 드는 게 무겁게 느껴져서 밥도 방으로 갖다 달라고 식당에 매번 부탁을 했다.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어렵게 누워서 잠을 청했고, 똑바로 눕는 자세만 가능해서 허리가 아파와도 몸을 혼자 일으킬 수 없어 모션베드와 남편의 도움을 받아 앉아있곤 했다. 하루에 한 번, 모자동실 시간이 찾아오면 아기가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몸이 아파서 먹이고 트림시키는 일도 대부분 남편이 했다. 대신 나는 그동안 궁금한 마음을 억눌러오셨을 양가 어른들께 영상전화를 걸어서 아기가 먹는 모습과 자는 모습을 열심히 보여드리곤 했다.


조리원에서의 첫 주말은 그렇게 먹고 자고, 모자동실 시간이 오면 아기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 영상통화를 하면서 흘러갔다. 수유 콜도 받지 않고 계속 잠을 보충하며 유축 텀은 점점 길어졌다. 주말이 지나 수술 후 일주일이 지나는 날, 예약된 산부인과 외래를 위해 외출을 했다. 퇴원하고 열심히 먹은 철분제가 빈혈에 효과가 있었기를 바라며 채혈을 하고, 검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진료를 봤다. 빈혈 수치는 간신히 정상 범위 안으로 회복했지만 복부 초음파 상으로 추가 출혈은 없이 2리터의 혈종이 그대로 있는 상태였고, 자궁과 수술부위는 다행히 잘 아물고 있는 중이었다. 수술부위 실밥을 제거하고, 한 달 뒤에 마지막 확인을 위한 외래를 잡고 가벼운 마음으로 조리원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회복이 늦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천천히 걷고 많이 자면서 온전한 회복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남편이 10일간의 출산휴가를 쓰고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남편도 입원기간이 나만큼이나 힘들었는지 나와 똑같이 많이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운이 좋게도 그다음 주에는 설 연휴가 있어서 나와 남편과 아기는 산후조리원에서 지내는 동안 계속 함께였다. 그래서 출산 전부터 고민했던 여러 아기 이름 후보들을 불러보고, 가장 입에 붙는 이름을 골라 출생 신고를 하기로 했다. 이름에 좋은 한자를 붙이는 게 어려워서 인터넷을 뒤지고 어플을 깔아서 이것저것 붙여보다가,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산후조리원에서 할인권을 준 작명소에 전화를 걸어서 우리가 지은 한글 이름에 맞는 한자를 받았다. 받고 보니까 그 이름의 의미와 해석도 우리의 가치관과 잘 맞아서, 기분 좋게 남편을 동사무소로 보내 출생신고를 할 수 있었다. 출생신고 자체는 분만한 병원에서도 할 수 있었지만, 2022년부터 신설된 여러 가지 지원금과 수당을 신청하기 위해 동사무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출생신고를 마치고 아기의 주민등록번호가 나오자, 공식적으로 우리 가족이 3명이 된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 무렵 아기와 나를 연결하고 있던 증거인 탯줄도 말라서 떨어졌는데, 나는 이 탯줄을 넣은 도장을 만들어서 아기 통장도 개설하기로 했다. 그래서 출생신고를 하자마자 탯줄을 도장 공방에 보내서 아기 이름을 예쁘게 새긴 도장도 주문했다. 요새는 탯줄을 보관하는 인형도 있고 여러 방법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아기에게 처음 주는 이름이라는 선물과 엄마인 나로부터 독립된 개체로서 존재하게 된 증거인 탯줄을 함께 기억할 수 있는 도장이 의미 있을 것 같아서 도장을 선택했다.


빈혈이 회복되고, 조리원에서 유명한 전신 마사지를 시작하면서 몸이 회복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심하게 부었던 하지가 정상인의 범주로 돌아오고, 온몸에 들어있던 멍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축 텀도 길어져서 조금은 몸이 편해졌고, 똑바로 눕는 자세뿐 아니라 옆으로 눕는 것도 가능해졌다. 그렇게 조리원에 온 지 일주일이 될 무렵, 처음으로 단유 마사지를 받았는데 어쩐지 조금씩 불편하던 가슴이 유선염이라는 원장님의 진단을 받았다. 몸의 다른 부위에 비해 가슴만 따끈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미 염증이 시작되어 열이 오르기 직전인 것을 몰랐던 것이었다. 하필 토요일 오후여서, 급하게 근처 산부인과에 전화를 돌려 진료가 가능한 병원에 가서 항생제를 처방받았다. 조리원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다 보니 정말 몸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고, 항생제를 먹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유선염과의 전쟁은 이 날이 시작이었는데, 병원에서부터 빈혈이 오고 유축을 제대로 못한 것이 근본적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단유를 하면서 너무 급하게 유축 텀을 늘린 것도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5일이 지나 다시 한번 단유 관리를 받았는데, 그때도 유선염이 해결되지 않아서 총 10일간 항생제를 먹어야만 했다. 유선염이 생긴 상태에서 단유를 하면서, 고여있는 모유를 짜내는 단유 관리는 상상 이상으로 아팠다. 유선염으로 잔뜩 굳어버린 가슴을 건드리면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끙끙대면서 한 시간 반을 버텨야 했다. 결국 나는 레시틴까지 주문해서 먹으면서 식단을 관리해 유선염이 다시 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조리원 안에서 걷는 것과 식당에 나가서 밥을 먹는 것이 힘들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회복되자, 어느새 2주를 계약했던 조리원이 5일 정도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수유 콜을 받아서 아기를 돌볼 수 있게 되었고, 식사 시간에 다른 산모들과 분유 이야기나 육아 아이템 이야기를 할 만큼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출산 전에 성장앨범을 계약했던 스튜디오에서 조리원에 찾아와서 아기 본아트 촬영도 했고, 그 사진을 여기저기 자랑하며 쏟아지는 축하 연락에 답장도 했다. 처음보다는 몸이 많이 나아졌지만, 임신 16주부터 운동도 전혀 못하고 누워만 지냈던 내 체력은 한 번에 회복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몸의 회복과 함께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그토록 원했던 동네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그리고 퇴실이 다가오자, 이제는 집에서 24시간 내내 아기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밤에 통으로 잠을 자는 것도, 피곤하면 낮잠을 자는 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자 아쉬운 마음에 억지로 잠을 더 청하기도 했다. 고통과 회복의 시간 동안 방 전체에 엉망으로 흩어진 짐을 정리하고, 이제는 다시 가방을 닫으며 진정한 육아의 세계로 나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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