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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cekim Jun 27. 2023

우산

하루 분량의 행복

대학교 새내기 시절, 나는 우산을 자주 새로 사곤 했다. 무거운 전공책을 이고 지고 지하철을 환승해 가며 1시간 넘는 거리를 통학하던 나에게, 장마철은 짐을 더해주는 눅눅하고 기분 나쁜 계절이었다. 챙겨야 할 짐이 많았기 때문에, 비가 그치면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우산을 놓고 다니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 용돈은 제한적었고, 긴 통학 시간 때문에 아르바이트할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았기에 비가 올 때마다 우산을 사는 일은 별로 합리적이지 않았다.


사실은, 경제적인 이유보다도 그 우산 가게가 너무 멋져서 나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가끔 밖에서 알록달록한 우산들을 구경하곤 했다. 학교 정문 앞에 자리한 그 우산가게는 색깔별로, 크기별로 우산들이 펼쳐져 있었고 왠지 그런 우산들을 고심해서 살피고 골라 구매하는 것조차 멋진 대학생에게 어울리는 일로 느껴졌다. 아무튼 허영과 실용의 마음을 잔뜩 안고 그 우산 가게에서 개성이 강한 우산들을 몇 개 펼쳐보고, 생각보다 높은 가격에 고심하며 그나마 저렴한 우산을 골랐다. 결국 멋진 우산을 갖겠다는 허영만 충족하고 알뜰함은 취하지 못한 소비였지만, 내가 그 멋진 가게의 고객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뿌듯했다.


아무래도 비싸게 주고 산 우산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나는 좀처럼 그 우산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작고 가볍게 접히는 우산이라서 손목에 걸어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펼칠 때마다 알록달록한 무늬가 즐거워 어쩐지 비 오는 날도 그렇게 싫지 않았다. 우산을 접지 않고 지하철에 타서 다른 이의 옷을 적시는 무례함과 축축한 냄새가 나는 통로, 필사적으로 소중한 전공책이 젖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하는 모든 순간에 그 멋진 우산이 함께였다. 그걸 다 견디고 학교나 집에 가까워져 출구를 나서는 순간, 경쾌하게 펼쳐지는 산뜻한 그 우산의 아름다움이 나의 불쾌함을 털어주는 것 같았다.


아마도 처음으로, 나는 우산을 잃어버려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써서 천이 해지는 바람에 새 우산을 사야 했다. 나처럼 그 우산 가게를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던 탓인지, 거기서 판매하는 우산이 너무 튼튼해서 다들 나처럼 우산을 자주 살 필요가 없었던 탓인지 또 가고 싶던 그 우산가게는 사라져 버렸다. 개성이 뚜렷하고 색이 모두 다른 우산들을 언제나 멋진 방식으로 진열해 두던 그 가게가 사라지자, 아무래도 우산을 공을 들여 사는 일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다음 우산을 어디서 어떻게 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양한 부분에서 나의 취향이 변했던 20대 초반을 보내며 우산을 정하는 기준도 조금 달라졌다. 아무래도 마음에 꼭 드는 우산은 만날 수 없었고, 잘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큰 우산을 선택했다. 물론 펼쳤을 때 범위가 넓어 조금 덜 젖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접이식 우산보다 무겁긴 했지만, 접고 펴기도 더 쉽고 두 사람이 쓸 수도 있었다. 나는 큰 우산을 들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지하철 출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려 학교 정문까지 우산을 함께 쓰고 가곤 했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긴 했지만 어쨌든 그 사람의 머리와 소중한 책이 젖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가끔 내가 빈손인 날엔 또 다른 사람이 내게 우산 반쪽을 공유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우산은 따뜻한 느낌이 들고, 좋아하는 물건이라 잘 말려서 소중히 대하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20대 후반이 되면서, 모르는 사람과 우산을 공유하는 일은 사라졌다. 비가 오는 날의 출퇴근은 이상하게 통학할 때보다 불쾌감이 배로 늘어서, 사람이 적은 이른 시간에 출근하고 남들보다 늦게 퇴근하는 것이 오히려 나았다. 물론 그런 출퇴근 시간이 자의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숨도 못 쉬는 축축한 지하철보다는 그냥 축축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곤 했다. 어쩌다 기상 예보를 잘못 보고 우산이 없는 날 비가 오면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서 잔뜩 툴툴거리며 집에 왔고, 그런 우산이 늘어나면서 어쩐지 내게 멋진 우산은 다 사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내 우산꽂이는 흔한 투명 우산 몇 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30대가 된 나는 이제 가게가 멋지다는 이유로 물건을 사지는 않는다. 물론 여전히 물건이 조화롭게 배치되거나 개성이 강한 것들을 보기 좋게 채워둔 가게를 만나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긴 하다. 무조건 구경을 해야만 허영을 채울 수가 있지만, 정말로 마음을 채우는 물건이 아니면 지갑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내 우산꽂이에는 노란 우산과 고흐의 아몬드나무 그림이 그려진 장우산이 꽤 오래 자리를 잡고 있다. 이제는 기능을 하지 못하지만, 비를 맞으면 무늬가 드러나는 노란 우산은 칙칙한 우산들 틈에서 꽤 존재감을 드러내는 부분이 내 마음을 움직여서 화창한 날인데도 샀던 기억이 난다. 아몬드나무 우산은 가족들과 봤던 고흐 뮤지컬의 인상 깊은 마지막 장면이 생각나서 샀는데, 그걸 산 곳도 가족들과 고흐 미디어아트 전시를 보고 나온 기념품샵이었다. 하도 쓰고 다니다가 축이 살짝 휘어서 불편한데도, 좋은 기억이 더해진 좋아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 도저히 버리질 못하고 이사할 때에도 고이 모셔오고 있다.


밖에 나갈 일이 있거나 없거나 미세먼지도 체크할 겸 무조건 아침에 날씨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된 요즘, 습도가 높기만 해도 나는 우산을 챙긴다. 그래서 갑자기 비가 와도 우산을 사는 일이 거의 없다. 소나기가 잦아진 요즘의 기후에 더없이 적절한 습관인 것 같다. 그러나 우산의 유무와 상관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적응되지 않는 눅눅함과 함께 어딘지 어두운 생각들이 연이어 들 때가 많다. 부정적 사고의 고리를 끊기 위해 나는 혈압이 낮은 인간은 비 오는 날의 낮은 기압과 어울리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라고 그럴싸한 변명을 댄다. 그렇게 비를 싫어하지만 비 예보가 보이면 좋아하는 우산을 챙겨야지 생각하고, 나는 어쩐지 20살의 그 멋진 우산가게를 떠올리게 된다. 사실 그렇게 좋아했던 우산의 생김새는 떠오르지 않으면서 그 우산가게는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으면 좋아하는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시켜놓고 읽던 책을 내려놓고 비구경을 하는 상상을 한다. 그쯤 되면 나는 아무래도 비 맞는 일을 싫어할 뿐, 진짜로 비 오는 날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좋아하지 않는 일의 범주를 줄여나가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그게 다 멋진 우산 덕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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