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이 기똥차게도 좋아서 1989년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평화’가 깃든 삶을 당연한 듯 살아왔다.
나는 독재정권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시위에 나갈 필요도 없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시민군이 되어 총을 들 필요도 없었다. 연애나 취업, 취미 생활 같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문제들을 고민하고,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을 보고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나의 삶이었다. 이 모든 건 그저 내가 운 좋게 그때에 그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재외국민 투표를 하기 위해 파리에 다녀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주의 주말이었다. 한국 뉴스에서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후보들에 대한 기사에 눈이 가지 않았다. 수많은 매체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수많은 뉴스를 쏟아내고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과 시간이 지날수록 결연해지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아 마음이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대선 후보들의 흑색 비방이 너무나 하잘것없을 뿐이었다.
날이 좋았던 주말에 투표소에 가니 그 순간이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내 나라의 대표자를 뽑기 위해 한 표를 행사하는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뭉클했다. 너무나 질서 정연한 투표 현장이 너무나 평화로워 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지구촌 시대를 살고 있다고, 초등학교 때 배웠었던가.
내가 투표를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지구의 몇 프로나 되는 인구가 나라의 대표자를 직접 뽑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라. 아니, 지구의 몇 프로나 되는 인구가 장래 희망을 갖고 꿈을 이루기 위해 살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그리고 지금 이런 모든 것을 누리는 지구의 운 좋은 사람들이 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생각해보라.
작금의 사태처럼 한 주권국가를 침공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었는가. 그저 운이 좋게 그 시대에 그 장소에서 태어나 평화를 누려왔으면서 인류는 충분히 진보해서 더 이상 폭력 없이 평화의 시대를 천년만년 누릴 것이라고, 야만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고, 그토록 안일하게 생각했었던가.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수천 년 역사를 온전히 실감할 수는 없겠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난 지 백 년도 되지 않은 오늘날에 여전히 전쟁과 폭력이 자행되는 국가를 수많은 매체를 통해 접하면서도 평화가 당연하다 여긴 것은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를 보며, 또 투표권을 행사하며, 내가 얼마나 태평했는지를 자각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이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귀한 목숨을 걸고 싸웠는지 실감했다. 우크라이나 한 청년의 인터뷰를 보았다. 시민군에 지원한 그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하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섣불리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그들이 느끼는 공포와 절박함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목숨보다 소중히 지키려는 것이 무엇인지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평화로운 삶 속에서, 혹은 물질만능주의에 찌들어 피곤한 사회에서, 그들의 절박한 투쟁을 지켜보자니 우리 삶 속에는, 그리고 역사 속에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운 좋게 평화를 누렸던 나는 자칫 잊고 있었겠지만 그 가치들은 수천 년 전에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고. 그러니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그저 먼 나라의 안타까운 소식으로 치부하지 말라고. 세상은 여전히 엉망이고 나아갈 길은 아직도 멀었으니 조상이 피로 쌓은 공적에 기생하며 안주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