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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아 Feb 13. 2022

지금, 온전히, 여기에

비록 아주 작은 구석일지라도 그 숲에 속한 땅이 되고 싶었다.

어느 날부터 내가 있는 공간이 무척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잠결에 눈을 떠 나를 둘러싼 곳이 어디인가 멈칫할 때도 있고 어느 주말 아침에 햇살이 드리운 집이 문득 여행 중에 잠시 빌린 숙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집에 정을 붙이고자 식물도 여럿 가져다 놓았고 벽에 좋아하는 포스터도 붙여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모든 것들은 유리벽 너머에 진열된 상품처럼 낯설고 차갑기만 했다.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집에서 마음이 놓이는 곳은 이불 안뿐이었다. 이불속이 가장 안전하다는 말이 우스개 소리가 아니었다. 이 낯섦 속에 몇 달을 살아보니 이곳에 사는 것은 나의 몸뿐이지 정신과 마음은 다른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하루의 순간순간은 저 멀리 살고 있는 나의 가족들과 오랜 친구들, 아니면 손에 잡히지 않는 컴퓨터 화면 속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재미있는 생각이 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물리적으로 살고 있는 세상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도 나는 제일 먼저 그들에게 알려줘야겠다 생각했다. 그들과 소통이 마땅치 않으면 인터넷에 끝없이 펼쳐진 영상이나 사진, 글과 같은 컨텐츠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말 그대로 마르지 않는 샘이 여기에 있었다.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자 굳이 애를 써서 사람들과 친해질 필요가 없었다. 분위기가 조금만 어색해도 입을 닫고 대화를 끊었고 불편한 사람은 애초부터 피했다. 종래에는 조금 가까워진 사람들과 약속을 잡는 것도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바로 마주하고 앉아 있음에도 그들의 세상과 내 세상의 교차점은 너무나 작았기 때문에 그 극도로 제한된 교차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물리적으로 같은 곳에 살고 있으면서 왜 이토록 교차점이 작은 걸까 의문이 들었다. 이것이 이 글이 시작된 계기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지만 나무 아래에 있으면 숲을 보지 못하는 법이다. 그동안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로지 혼자만의 안락을 누리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나는 그림자가 드리운 땅은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 좇으며 안녕하다고 생각한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땅이 어떠한지는 외면하면 그뿐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자 그늘은 내게 더 이상 안락을 주는 곳이 아닌 도피처일 뿐이었다. 그늘을 없애고 이곳과 다른 곳의 경계를 없애고 싶어졌다. 내 자리가 비록 아주 작은 구석일지라도 그 숲에 속한 땅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늘을 없애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 공간을 잊게 해주는 것들, 이를 테면 멀리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가상공간 속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그리고 언제가 어디선가 이루고 싶은 막연한 꿈들까지. 이것들을 어떻게 지워버릴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 모든 것들을 곁에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고무적인 것은 이제 그것들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그것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나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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