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고는 국립무용단의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를 비평의 대상으로 한다. 해당 작품은 2021년 11월 11일부터 11월 1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들어가며
2021년 9월, 3년이 넘는 변신 끝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은 새로워진 모습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익숙하지만 낯선 그곳에서 국립무용단은 신작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를 통해 새로운 극장에서의 시작을 알렸다.[1]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제목처럼 쉽지 않은 공사를 거친 극장과 다른 극장들을 떠돌아야 했던 국립무용단 모두 무사히 돌아왔음을 선언하는 작품이었다.
국립무용단이 그 시작으로 선택한 것은 무속신앙의 주요한 절차 중 하나인 ‘내림굿’이다. 새로운 샤먼(shaman)이 탄생하는 과정을 무대 위에서 재현하며 자신들의 귀환을 이야기한다. 무속신앙의 퍼포먼스는 종교행위임과 동시에 예술행위이기도 한 만큼, 무속신앙을 모티브로 한 무용공연을 선보이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달랐다.
샤먼이라고 하면 우리는 으레 붉은 빛의 알록달록한 의상과 격렬하고 원시적인 리듬의 음악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작품 속 샤먼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채도가 낮은 기성복을 입고 단조로운 음악에 몸을 맡긴 그들의 모습은 지금껏 우리가 보아온 샤먼의 모습보다 우리 곁에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이웃처럼 보인다. 그렇게 “무대 위 무용수는 모두 샤먼”이 되고, 범인(凡人)의 모습을 한 샤먼들은 이 작품을 보게 된 우리 마저도 샤먼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한다.[2]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적으로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도 예술은 “독특한 분위기”[3]로써의 아우라(aura)를 통해 인간을 압도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의 샤먼이 된 무용수들은 의상과 음악, 도구로부터 비롯된 아우라들을 벗어던진다. 평범한 모습을 한 샤먼들은 샤먼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의 어떤 모습을 그들에게 투영하고 있을까?
무사함에 안도하는 리추얼(ritual)
한국 사회에서는 개업이나 이사와 같은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고사(告祀)를 지낸다. 고사는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앞으로의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리추얼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순간까지 오기 위한 험난한 순간들을 딛고 무사히 지금에 도달했음에 안도하는 리추얼이기도 하다. 공연을 앞둔 극장에서도 그 포문을 여는 것은 고사의 리추얼이다. 공연을 함께 만들어낸 이들은 고사에 참여하며 지금까지 제작과정이 무사히 마무리되었음에 안도하면서, 앞으로의 공연이 안전히 끝날 수 있길 기원한다.
종교학자인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사람이 주거를 선택한다는 것은 세계의 창조를 시도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들의 작업인 우주 창조를 모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에 흠뻑 젖은 비극적인 우주 창조도 있기 때문이다. 즉 신의 행위의 모방자로서 인간은 그것을 재현해야만 한다.”[4]
전속단체인 국립무용단에게 해오름극장은 집과 같은 존재다. 오랜 기간 집을 떠나 다시 새로운 모습을 한 집으로 귀환한 이들은 세계의 창조를 시도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작업을 또다시 수행해야 한다. 이 어려움 앞에서 국립무용단은 자신들만의 방식의 고사를 지낸다.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국립무용단이 해오름극장에 바치는 한 편의 거대한 고사이다. 무사히 돌아온 극장과 무용단, 그것을 보며 안도하는 관객들의 모습이 만나 해오름극장은 앞으로 더 무사하고 안녕한 나날을 기대할 수 있다.
험난한 여정 끝의 귀환을 안도하는 여정은 샤먼들의 생애와도 닮았다.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 속 내림굿에 임하는 샤먼들은 신내림이라는 운명 앞에 신병(神病)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끌어안고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지금껏 자신이 이루어왔던 생애를 모두 버리고 신과 세상을 연결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은 이들에게는 내림굿 이후에도 죽음 못지 않은 고난의 연속이 기다린다. 엘리엇(T. S. Eliot)의 시 「황무지」의 제사(題詞)에서 샤먼은 “무녀야, 넌 무얼 원하니?”라는 질문에 “죽고 싶어.”라고 답한다.[5]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더 낫겠다는 마음이 투영된 대답이다.
하지만 샤먼들은 이러한 고통을 딛고 다시 일상으로 귀환한다. 내림굿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지만, 그들은 마치 범인의 모습을 한 무대 위 무용수들처럼 사회 곳곳에 섞여 매일매일의 일상을 지속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의 시간과 영혼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샤먼을 관통하는 시간들
이원석 시인의 장시(長詩) 「Long walk」에서 무녀는 “과거 데이터를 업로드하여 기억들을 재생”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과거로부터 누적된 망자(亡者)의 영혼을 반복하며 그들은 “그 안에서 과거를 살아”간다. “산다기보다는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관람”에 가까운 생애 속에 그들은 “미래적 사고를 할 수는 없”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채 “지금까지의 삶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추억을 반복하며 살아도 좋”다고 말한다.[6]
샤먼은 자신의 시간을 지워버린 채 세상의 복합적인 시간을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추억할 수 없고, 자신의 미래를 꿈꿀 수도 없다. 그는 현재의 몸을 살아가며 과거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미래를 향한 예언을 전달할 뿐이다. 아마도 신내림의 과정이 고통스럽게 여겨지는 것 또한 자신의 시간을 세상의 시간으로 치환하는 과정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복합된 삶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버려야 하는 운명에 순응한다.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무용수를 세 개의 집단으로 분류하여 샤먼에게 관통하는 시간의 감각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낸다. 내림굿을 이끄는 주무자(主巫者)는 과거에 신내림을 경험했던 사람이다. 조무자(助巫者)는 현재, 바로 이 순간에 벌어지고 있는 내림굿의 여정을 함께한다. 그리고 입무자(入巫者)는 내림굿을 통해 기존의 삶에서 벗어나 미래의 샤먼으로써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주무자-조무자-입무자로 구성된 무용수들은 각기 서로 다른 집단에 섞이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며 샤먼이 경험하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시간 감각을 무대 위에서 보여준다. 게다가, 주무자-조무자-입무자의 역할이 실제 무용수의 연령대와는 무관하게 부여함으로써 세상의 시간을 끌어안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포기해야 하는 샤먼의 운명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세 개의 집단을 통해 선보이는 샤먼의 시간은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극장에 들어오기 전 자신에게 축적된 과거의 시간들로부터, 공연을 관람하는 현재의 시간, 나아가 공연이 끝난 후 극장을 나선 뒤에 펼쳐질 미래의 시간들까지. 샤먼을 통해 관객들은 시간의 감각을 환기한다.
그러나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함으로 가득하고, 우리 스스로를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든다. 무사귀환에 대한 안도감을 보여준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숭고의 경험을 통해 관객들에게도 불안감을 안도감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이끌어낸다. 이는 미래에 대한 예언을 통해 사람들의 불안을 해소하는 샤먼의 행위와 맞닿아있다. 관객들은 숭고의 경험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아 극장 밖을 나설 수 있게 된다.
숭고의 경험을 통해 확장되는 세계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는 “현시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관람객들은 ‘숭고’(sublime)를 경험한다고 보았다. 사실 이것은 “볼 수 없도록 함으로써만 볼 수 있게 하고, 그것은 고통을 야기함으로써만 기쁨을 준다”는 ‘숭고회화(peinture sublime)’를 비롯한 시각예술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7]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이러한 숭고의 경험을 공연예술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무용은 음악을 통해 움직임을 구현하는 예술이다. 음악이 담고 있는 선율과 박자는 움직임을 통해 극대화되고, 역으로 움직임은 음악을 통해 더 강렬한 이미지를 담아낸다. 하지만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의 일부분에서는 과감하게 음악을 소거한다. 어떠한 선율도 없이 적막만이 남은 극장을 가득 채우는 것은 관객들이 유발하는 백색소음과 무용수들의 발자국소리,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뿐이다. 어떠한 음악도 들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무용수들은 자신 내면에 있는 어떤 음악에 몸을 맡긴다. 관객들은 그렇게 들리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음악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의 모습을 관람한다. 들을 수 없도록 함으로써만 들을 수 있게 하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새로운 숭고의 기쁨을 마주한다.
뿐만 아니라 공연의 후반부로 넘어갈 때면 움직임 없이 움직임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후반에 해당하는 3부에서는 무용수 뒤편의 배경에 영상이 활용된다. 무대 위에서 점점 존재감을 키우던 영상은 마침내 무용수들 대신 무대를 가득 채우기에 이른다. 소수의 무용수만이 무대에 남아 한 켠에 앉아 관객과 함께 영상을 바라볼 뿐이다. 무용에서 움직임이 사라진 낯선 광경 속에서 관객들은 또 한 번 숭고를 경험한다. 명시적인 움직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앉아있는 행위 그 자체로도 하나의 움직임을 구성한다. 그 안에도 나름의 의미가 부여되고, 안무가와 무용수들은 그 앉아있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표현한다. 관객들은 볼 수 없는 움직임 속에서 숨겨진 움직임을 발견하는 여정을 함께한다.
들을 수 음악으로부터 무언가를 듣고, 볼 수 없는 움직임으로부터 새로운 움직임을 발견하는 과정을 통해 숭고를 경험한 관객들은 공연이 끝난 후 더 확장된 세계를 경험한다. 극장 밖에서도 그들은 지금껏 듣지 못했지만 존재하는 무언가, 보지 못했지만 분명 그곳에 있는 무언가를 감각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마침내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세계의 새로운 이면을 발견할지 모른다. 내림굿을 통해 범인(凡人)들은 듣지 못하는 영혼의 소리와 형상을 느낄 수 있는 샤먼들의 운명처럼.
나오며
마지막 장면에서 무용수들에게 국한되었던 무대 위의 샤먼의 행위들은 관객들에게 확장된다. 무용수들의 배경이 되어주는 영상은 도시의 일상적 공간들을 담은 콜라주의 형태로 변화한다. 무대로부터 객석을 향해 점차 넓어지던 무대는 벽체의 방향이 전환되며 객석으로부터 무대를 향해 넓어지는 모양새를 취한다. 무대 위 무용수를 비추던 조명들은 금속재질의 벽체에 반사되어 관객들의 눈을 부시게 한다. 쉽게 눈을 뜰 수 없이 산란되는 빛 속에서 관객들은 객석의 반대편을 향해 나아가는 무용수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관객들에게 따라오라고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엔딩은 내림굿을 거쳐 다시 일상으로 나아가는 샤먼들의 모습과 재난의 끝자락에서 일상을 되찾으려는 우리들이 서로 닮았음을 암시한다. 2년을 넘어 3년이 되어가는 팬데믹이라는 재난 속에서 일상과 이별해야 했던 우리는 이제 그 끝자락에서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꾼다. 극장에도 객석 간 거리두기가 사라지고 아티스트들의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며 일상이 돌아오고 있다는 설렘을 품게 한다. 익숙하지만 낯선 일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긴 기간의 공사를 거친 해오름극장과 내림굿의 고통을 견뎌낸 샤먼에 못지 않은 고난의 시간들을 이겨내고 지금 이렇게 서 있다. 그래서 무대 위 샤먼으로써의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공연을 보는 관객에게도 확장되는 것이리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앞에는 여전히 재난의 폐허와 상흔이 남아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림굿을 견뎌낸 샤먼들의 모습처럼 반드시 일상으로 무사히 귀환할 것이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나긴 여정의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이제 ‘다녀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새로운 일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1] 엄밀히 말하면, 국립무용단이 리모델링 이후 해오름극장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은 2021년 6월 24일부터 6월 26일까지 공연된 《산조》다. 그러나 《다녀와요, 다녀왔습니다》는 정식 재개관인 2021년 9월 이후 처음 선보인 작품이며, 국립무용단 또한 “국립무용단이 새단장한 해오름극장에서 처음 선보이는 대작”이라는 홍보 문구를 사용한 만큼 이와 같이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