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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Jun 11. 2024

무례한 침입자

- 나의 분노 버튼


 온 가족의 싱가포르 여행 첫날. 호텔 체크인을 할 때였다. 우리가 예약한 리버뷰의 방 2개가  모두 에어컨 고장으로 수리 중이란다. 호텔 직원은 미안하다며 4인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패밀리룸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패밀리룸은 내가 예약하려다 가격이 비싸 포기한 방이었다. 저절로 올라가려는 광대를 인중을 힘껏 당겨 눌러가며 물었다.

  "추가 요금이 있습니까?"

  "나띵!(Nothing)"

  "일단, 방을 먼저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나는 호텔직원 앞에서 끝까지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호텔직원은 한국말을 몰랐고, 아이들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만 알아들을 수 있게 매우 낮은 톤으로 이 신바람 나는 상황을 전달했다.

  "얘들아, 오우 대박. 풍악을 울려라. 우리 패밀리룸으로 간다."

 (추후 나는 이 순간을 칭찬하고 칭찬했다. 호텔 직원 앞에서 기뻐하며 날뛰지 않은 나 자신 말이다.)  


  대망의 패밀리룸은 나선형 복도를 돌고 돌아 나온 오르막길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경사진 방은 기이할 정도로 길쭉했다. 마치 누군가 최대한 긴 호텔방을 만들어보자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 길쭉하고 경사진 방에 침대와 화장실과 테이블과 티브이가 야무지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방 창문을 열자 바로 앞 건물의 벽이 인사했다. 잘하면 하이 파이브도 가능할 것 같은 거리였다. 우리 가족은 할 말을 잃었다. 환기가 원활하지 않은 공간에서 나는 특유의 쾌쾌함이 그 적막을 채웠다. 이게 정말 패밀리룸인가……. 보정 효과를 감안하더라도, 내가 사진으로 봤던 패밀리룸과 전혀 다른 방인 것 하나는 확실했다. 앞으로 5일이나 머물러야 할 방이었다. 솔직히 나는 취향이 무딘 사람이라, 지내려면 지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니었다. 우리는 프런트로 향했다.   


  "저희가 예약한 방보다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아 보입니다. 예약한 리버뷰의 방을 볼 수 있습니까?"

  "그 방은 지금 공사 중이라, 몸에 좋지 않은 화학물질이 가득합니다."

  "그럼 비슷한 조건의 다른 방을 보여주세요."

  "다른 방은 모두 손님들이 이용 중입니다. 다른 방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환불을 원합니다. 당신이 제안한 패밀리룸을 이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직원은 우리가 예약한 방은 환불 불가 상품이라고 말했다. 지리한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빨리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짐을 챙겨 아이들과 프런트 바로 앞에 있는 로비 의자에 앉았다. 지친 아이들에게 탭과 핸드폰을 쥐여주고 와이파이와 마실 음료 등 이것저것을 챙겼다. 그 사이 남편은 호텔직원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여의찮으면 내가 가족들을 설득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직원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직원은 남편이 무슨 말을 하든 녹음기같이 환불 불가라는 말만 반복했다.   

  "당신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약한 방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호텔의 책임입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남편은 내내 예의 있는 태도로 말했다. 남편은 직원의 영어 발음을 때때로 알아듣지 못했고 직원은 무시하는 태도로 환불 불가라는 말만 성의 없이 반복하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나는 화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오늘이 당신의 나라를 방문한 우리 여행의 첫날입니다. 아름다운 여행의 시작을 망치지 말아 주세요. 로비에 앉아 있는 내 가족들을 보세요."

 매우 감상적인 호소였다.   

  '왜 저렇게 친절하게 말하는 거야?'

 내내 웃는 얼굴로 직원을 대하는 남편이 답답했다. 남편의 말을 들은 직원이 아이들과 나를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게 뭐? 패밀리룸을 제공했는데, 당신들이 싫다고 했잖아요."

 그때 나의 분노 버튼이 눌렸다. 나는 더 이상 참고 지켜볼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상대해야 할 '무례한 자'였다.


 '무례한 자'와 관련된 공자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제자들과 순행하던 공자는 길에서 똥을 싸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공자는 그를 크게 혼낸다. 다시 길을 걷다 이번에는 길 한가운데서 똥 싸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때 공자는 그를 못 본 척하고 지나간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제자들이 공자에게 그 이유를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길가에서 똥을 싼 사내는 양심은 있어 가르치면 되지만, 저놈은 양심 자체가 없는데 무엇을 가르칠 수 있으랴."

 이를 '하우불이(下愚不移)'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의 버릇은 절대 고치지 못한다.'는 고사성어다.


 나는 일상에서 무례한 인간들을 만나면 대부분 '하우불이적 자세'를 취한다.  '네가 그 정도 인간 밖에 안된다면, 내가 너를 상대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너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심산이랄까? 화는 나지만 그다음 행동까지 취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런 무례한 사람을 만나도 화가 날 뿐, 분노의 단계까지 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잔인하게도 살다 보면 그런 무례한 자를 꼭 상대해야 할 때가 생긴다. 그 무례한 자가 '나의 영역'을 침범하려 할 때다. 그때 나는 분노한다.   

 

 나는 프런트로 돌진했다. 그리고 준비한 포환을 던지기 시작했다. 뻐꾸기처럼 같은 말만 해대는 직원에게 나도 뻐꾸기처럼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그러니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었다. 그 무례한 인간이 남편에게 한 말과 행동이 머리 한쪽에 동시상영됐다. 나의 분노는 실시간으로 보충됐다. 최악의 경우 환불을 받지 못하더라도 이 호텔에 머물 수는 없었다. 그러니 나는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내 할 말을 다 쏟아내고 나서,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곳의 책임자를 만날 수 있게 해 달라.'

 그도 계속 같은 말을 했다.

  '환불 불가 상품이다.'

 참 창의력 없는 만담 커플의 탄생이다. 결국 둘 중 지구력이 강한 사람이 승기를 잡았고, 만담은 박수 없이 막을 내렸다.


 캐리어를 끌고 호텔을 나설 때, 첫째 아이가 내게 물었다.

  "아니, 근데 왜 서로 같은 말만 반복한 거야?"

  "서로 원하는 게 달라서 그랬어."

  "싸움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하나를 말해서 안 되면, 다른 걸로 설득해야지."

  "몰라 몰라. 저 사람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어."

  "그게 뭔데?"

  "엄마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 아빠를 함부로 대했어."

  "나쁜 사람이네."


  가장 좋은 것은 무례한 자를 만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무례한 자들은 지뢰처럼 숨어있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우리 삶의 행로에 불쑥 끼어든다. 그럴 때 분노는 나의 무기가 되어준다. 나의 전투력을 강화해 주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안온한 정신에 경종을 울려준다. 하지만 그 뜨거운 무기를 자주 꺼내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마른하늘에 외쳐본다.

  "무례한 자들아. 길을 비켜라!"

만개한 하늘, 싱가포르 포트캐닝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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