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잔잔 Dec 29. 2023

'입'과 '잎'

- 사춘기 아이와 겨울나무


사춘기 아이 말을 참 아낀다. 상대의 환담에도 가진 것을 내놓을 줄을 모르니, 대화에 있어선 색한 '자린고비'가 분명하다. 자린고비의 지독한 행실을 한 번 볼까?


자린고비는 시장에 나가 생선 만진 손을 솥에 씻어 국을 끓여 먹고, 장독대에 앉았다 날아가는 파리를 수십 리 쫓아가 다리에 묻은 장을 빨아먹고 놓아주는 기행도 서슴지 않는다. 이야기 속 자린고비는 사소한 사물들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아끼는데, 아이가 말을 아끼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극단적일 때가 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육자로서 꼭 해야 할 말이 있고, 그에 따른 대답을 들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아이가 입을 꽉 닫아버린다. 비밀번호가 걸린 도어록 같다. 잘하면 풀 수 있을 것 같지만 한나절을 투자해도 풀 수 없다. 


생일부터 탄생연도까지 가능할법한 네 자릿수 조합을 시도해 본다. 때론 0000부터 9999까지 대책 없이 눌러보는 날도 있다.  그러나 상대는 자린고비가 아닌가? 철옹성 같은 문이 쉽게 열릴 리 없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잔소리 쏟아내거나, 고성이 난무하는 저질 대화를 하고 싶지는 않다. 교육상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나를 위해서다. 아이는 나와 너무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리적 거리가 가까운 사람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불행한 일이므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로소 정착한 방법은, 문제상황이 발생하는 즉시 아이와 함께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 오르는 것이다. 자린고비가 주머니를 열 수밖에 없게 하려면 극단적인 조건을 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산행을 아주 싫어하기에 산은 그 극단성을 넉넉하게 제공해 준다. 산행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입을 여는 것. 나는 아이와 충분한 대화를 나눌 때까지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이 방법을 처음 시도한 날, 아이가 거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다. 안 가겠다고 버티기라도 하면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아이를 강제로 끌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거부는 없다'는 단호한 태도로 일관하리라 마음먹었지만, 외에 대비책 같은 것은 없었다. 내가 가진 모든 단호함을 단전에 끌어모아 위엄 있게 말하려 노력했다. 다행히 아이는 평소와 다른 엄마의 표정과 말투와 제3의 무엇을 감지하고 길을 따라나섰다. 나는 이 기적에 가까운 수용을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하게 됐다.


산 초입부터 분명히 해두었다.

"올라가는 동안 엄마가 하고 싶은 얘기를 먼저 할 거야. 엄마 말이 다 끝나면 너한테 말할 기회를 줄 거니까, 엄마 말 듣는 동안 잘 생각하고 있어. 네가 말하기 시작하면 바로 뒤돌아서 내려오면서 대화할 거야. 그런데 또 입을 다물어버리면 바로 뒤돌아서 다시 올라갈 거야. 엄마는 5분 정도만 말할 거니까 올라가는 시간이 얼마가 될지는 네 몫이야."


'말할 기회'라니... 내가 말해놓고도 참 어이없는 표현이다. 입도 뻥끗하기 싫은 애한테 선심 쓰듯 말할 기회를 주겠다니 말이다. 발상의 전환이라고 포장하고 싶다. 아이에게 말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의사표현의 기회를 갖는 것이라 여겼으면 다.


"네가 말을 안 하면, 계속해서 갈 거야.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다 갈 수 있댔어." 말도 안 되는 추임새도 좀 넣었다. 숨은 뜻은 '힘들어서 저 세상 가기 전에 꼭 입 좀 열어라.'다.


산을 내려가는 유일한 방법은 입을 여는 것. 그러니 아이는 할 말이 있든 없든 일단 입을 열긴 열어야 한다. 생각 담긴 말이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면 순간의 감정이라도, 아니면 되지도 않는 말이라도, 뭐라도 뱉어내야 한다. 그렇게 산행은 아이에게 입을 열기 위한 워밍업(warming-up)이 다.


산행을 시작함과 동시에 문제 상황을 짚어나갔다. 되도록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말하려고 노력하는데, 이때 산이 제공하는 극단성이 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산행을 즐기지 않는다. 비루한 체력이 즐길 여유 같은 걸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산행 시작과 동시에 금세 숨이 차오르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팽윤 했던 전투력이 거친 들숨과 날숨 속에 공중분해되기 시작한다. 어떨 때는 호흡을 고르느라 아예 말을 좀 멈추기도 해야 한다. 힘이 드니 저절로 말의 속도가 조절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래서 나에게 산행은 아이와 반대로 입을 좀 다물기 위한 쿨다운(cool-down)의 시간이 되어준다.


아이의 워밍업과 나의 쿨다운이 교차하는 시간 그 어디 즈음에서 아이의 입이 서서히 열렸다. 우리의 첫 산행은 채 15분이 되지 않았다.


얼마 전, 아이와 뒷산에 올라야 할 일이 발발했다. 인간은 엄청난 적응력을 가진 동물이 아니던가? 아이와 나는 비교적 가볍게 산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겨울 산행은 처음이었는데 잎 하나 없이 꼿꼿하게 서있는 겨울나무가 입을 꾹 닫은 아이의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가을이 되면 겨울을 날 채비를 한다. 겨울나무에게 중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생존.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무는 최소한의 것만 남기기로 결단을 내린다.


나무는 제일 먼저 수분과 양분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뭇잎을 떨어뜨릴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가 바로 우리가 감상하는 '단풍'이다.


나무는 광합성을 해서 영양분을 생산하는 엽록소부터 포기한다. 더 이상 새로운 엽록소를 만들어내지 않고, 기존의 엽록소도 다 파괴되어 없어지도록 내버려 둔다. 녹색을 띠는 엽록소가 힘을 잃어갈 때, 가려져 있던 색소인 안토시아닌과 크산토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붉은색과 노란색을 담당하는 색소 되시겠다. 비로소 나뭇잎은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감상하는 이들에겐 아름다운 빛깔이고, 나무에겐 생존을 위한 서막이라 할 수 있겠다.


붉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은 예쁘지만 양분을 만들어내지 않고, 나무는 수분과 양분의 공급을 차단해 예쁘기만 한 잎을 과감하게 떨어뜨린다. 생존을 위한 극단적인 변화이다. 나무는 그렇게 계절을 겪으면서 성장해야 할 때와 생존해야 할 때를 본능적으로 알고 움직인다.


울긋불긋 여드름을 피워내며 치열한 호르몬의 변화를 겪는 사춘기 아이들. 그들에게 찾아온 혹독한 변화는 성장과 생존의 기로에 선 나무 같다. 곧 질풍노도와 같은 변화의 시간이 그들을 덮칠 것이니, 어엿한 어른으로 우뚝 서기 위해 잎을 떨어뜨릴 준비에 나서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전과 같이 해맑을 수 있겠는가? 목숨을 내건 전투를 치르는 중이니 말이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절벽 끝에 선 듯 힘들었던 나의 사춘기도 생각났다.


제멋대로인 말괄량이의 대명사 '삐삐'. 삐삐의 저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작품을 쓸 때, 주인공이 권위에 도전하는 방식 중 하나로 '버릇없는 행동'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성장에는 기성세대를 향한 반기가 필요하다는 그녀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자유분방하고 엉뚱해서 기존의 틀에 도무지 들어맞지 않는  '삐삐적 감성'말이다. 그렇게 보면 아이의 침묵은 기성세대인 부모에게 도전하는 아이의 고요한 성장이자 생존이 아닐까 싶다. 사지에 붙은 잎을 죄다 떼어내고 당차게 버티고 서있는 겨울나무처럼 말이다.


부모는 그저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된다는 정답지를 손에 쥐고 지만 정답대로 써 내려가지 못할 때가 많다. '최대한' 이해하려 하지만, '최소한'의 훈육은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 들 때 더 그렇다. 그런 생각이 드는 열 번 중 한 번은 산행에 나선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므로 참고 참았다 뱉어내는 엄마의 말도, 쥐어짜서 뱉어내는 아이의 말도 산은 다 듣고 다 흘려보낼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걷는 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