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 반쯤 미쳤던 때가 있었다. 시제가 과거형인 까닭은 이제 내가 그 광기에서 조금 멀어졌기 때문이고, 미쳤다는 과격한 표현은 다시 그만큼의 열정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걷는 것이 좋아진 그때,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나는 왜 걷는 것이 좋을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단순히 걸으면서 보는 풍경이 좋아서라거나, 걸을수록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서와 같은 이유 너머에 무엇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걸을수록 내가 나답다고 느껴졌다.걷기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었다.
처음엔 나처럼 걷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가벼운 책들부터 살펴봤다. 「걷는 인간 하정우」라는 배우 하정우의 에세이(사심 가득 담아)부터 시작된 독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존 헨스의 「코스모사피엔스」까지 도달했다. 나는 걷고자 하는 인류의 본성이 담긴 책들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러다 10여 년 만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다시 집어 들었다. 단순하고 간소하지만 치열한 그의 삶을 엿보면서, 수렵활동은 인간의 유전자 깊숙이 내재된 본능이며 그것과 가장 가까운 행위는 걷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로 내가 걷고자 하는 열망을 느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끌림인 것이다.
나는 소로의 삶을 되짚으며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수렵하는 삶'을 실천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활과 마체테를 챙겨나가 열매를 따고 동물을 사냥할 수는 없다. 될 수 있는 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수렵하듯 걸으며 내 삶에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해 보기로 했다. 부피가 크지 않은 생필품에 한해서 내 힘으로 들고 걸어올 수 있는 것들은 꼭 그렇게 구입하리라 마음먹었다. 필요한 물건들의 목록을 작성해 적당한 배낭과 카드를 챙겨 집을 나섰다. 그렇게 21세기형 자발적 수렵활동이 시작됐다.
왕복 3.4km 거리에 있는 마트가 나의 수렵터였다. 더 가까운 곳에도 마트는 넘쳐 났다. 그러나 빈 배낭으로 30분, 채운 배낭으로 30분을 걸을 수 있는 그곳이 나의 빈곤한 체력과 넘치는 열정을 조율하기에 딱 적합한 장소였다. 막상 수렵을 시작하자, 내가 지고 갈 수 있는 만큼의 물건을 사는 간단해 보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느 때는 필요한 물건이 넘쳤고, 어느 때는 사고 싶은 물건이 넘쳤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고 무심결에 담은 물건들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후회와 고통이 동반자가 되기도 했다.
수렵활동을 하는 동안 나는 나의 체력적 한계를 객관적으로 가늠할 수 있어야 했고, 욕구는 끊임없이 조절해야 했다.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상한 짓을 나는 몇 달 동안이나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렵터에서 수박을타임세일했다. 과일 중 수박을 가장 좋아하는 둘째 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이다 '한 번 들고 가보자.'는 쪽으로 생각이 굳혔다. 7kg에 육박한 수박을 배낭에 간신히 집어넣고 집을 향해 출발했다. 십 분쯤 걸었을까... 한 여름도 아닌데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숨을 골라가며 걷다 쉬다를 반복하던 나는 나의 체력이 한계치에 왔음을 깨달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일찍이 나의 수렵활동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본론부터 집어던졌다.
"마트에서 수박을 샀는데, 도저히 못 들고 가겠어. 논둑에 버리고 가던지, 발로 차서 굴리면서 가던지 해야 할 것 같아."
"그래. 발로 차."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했을까. 지금 돌아서 마트로 가기엔 너무 많이 걸어왔어. 근데 또 집까지 가는 길도 아직 많이 남았단 말이야."
"그래. 논둑에 버려."
"잠깐 생각 좀 하고 결정할게. 진짜 버려버릴 수도 있어."
통화를 하는 사이 또 다른 선택지들이 떠올랐다. 논둑에 수박을 잘 숨겨놓고, 차를 타고 와서 숨겨둔 수박을 찾아간다. 누군가 먹어주길 바라며 잘 보이는 곳에 수박을 두고 간다. 나는 길바닥에 "좋은 수박입니다. 너무 무거워 두고 갑니다. 누구든 먹어주세요."라는 수상한 메시지를 돌로 세기고 있는 내 모습까지 상상했다. 지금 당장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가는 방법도 있다. 수박을 세일가가 아닌 제 값을 주고 샀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좀 비겁하게 느껴졌다.
'반칙이야! 지고 가거나 버리거나 둘 중에 선택해야 해!'
내 안에 수렵인이 소리쳤다. 수박을 처음으로 발견한 진짜 수렵인은 어떻게 했을까? 그라고 별 수 있었을까 싶지만, 그에겐 나보다 불리한 면과 유리한 면이 있다. 불리한 면은, 체력이 곧 자신의 생존인 그의 세상에서 나처럼 죽을힘을 다해 수박을 지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유리한 면은 나보단 사회적 체면치레를 좀 덜 해도 될 테니 수박을 빠개서 길바닥에 앉아 절반 정도는 먹어치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충전된 체력으로 남은 절반은 가족들을 위해 지고 갈 수 있겠지.
산티아고 길을 걷는 여행자들 사이엔 '지금 자신이 지고 가는 가방의 무게가 곧 자신의 삶의 무게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지금 내 삶의 무게는 정확하다. 70kg 같은 7kg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박을 지고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번 마음을 먹고 나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무겁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 힘들지만... 어쩔 수 없다. 무겁고 힘들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이 수박을 끝까지 지고 가야 한다.'
그렇게 수박과 함께 하는 길은,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야 할 길이 됐다. 나는 걷고 또 다시 걸었다.
삶의 무게까지 생각하게 만들며 이고 지고 품고 온 수박은 아이들의 입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스스로의 아둔함을 자책하며, 내가 한 수많은 의사결정을 수없이 후회했었다. 그런데 그 고행의 길이 진행형이 아닌 과거형이 되는 순간, 모두 배불리 맛있게 먹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무게도 그런 것일까?
나의 뜨거웠던 자발적 수렵활동은 여름이 찾아오고 본격적으로 날이 뜨거워지면서 잦아들었다. 몇 달을 같은 경로로 걷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따라온 풍경의 지루함도 한몫한 것 같다. 나는 수렵인들이 왜 정착할 수 없었는지 간접적으로 이해했다. 물론 '지루함' 따위 같은 한가로운 이유는 아니겠으나, 같은 곳에서 새로운 수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은 지난 수렵활동을 떠올리며 필요한 것들을 사서 배낭에 메고 먼 길을 일부러 돌아 돌아 걷는다. 걷는 행위 자체로 내 깊숙한 곳에 꿈틀대는 본능이 채워지는 것을 느낀다. 순수한 만족이다. 요즘도 나는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