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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Jul 17. 2023

몰입의 순간

- 쥐똥나무의 강전정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엔 쥐똥나무가 가득하다. 검게 익은 열매가 영락없이 쥐똥과 닮았다 하여, 쥐똥나무. 쥐똥나무는 4월까지 있는 듯 없는 듯하다가, 5월 중순이 되면 어마어마한 향기로 존재감을 뿜어낸다. 멀리 풍기는 향은 아카시아꽃과 비슷하지만 작은 꽃에 가까이 다가서면 훨씬 달콤하고 깊은 향이 난다. 그래서 쥐똥나무 꽃향기의 진가를 아는 이들은 직관적 작명 방식으로 탄생한 볼품없는 이름을 안타까워한다.



매년 5월 중순이면 만개한 쥐똥나무 꽃향기를 음미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4월 말쯤. 쥐똥나무 가지가 인도를 향해 너무 길게 뻗어 의도치 않은 하이 파이브를 하게 됐을 때였다. '가지치기할 시기를 넘긴 것 아닌가?' 그저 잠깐 생각했었다. 그리고 막 꽃봉오리가 올라오는 시기인 5월 중순을 맞이했다.


하루 사이, 쥐똥나무는 처참하게 잘려 나갔다. 전정(가지치기) 작업을 한 것이다. 직각에 충실한 모양으로  레고 조각처럼 잘려 나간 나무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왜 지금이어야 했을까? 이제 막 꽃봉오리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꽃봉오리는 가지와 함께 흔적 없이 잘려 나갔다. 애처롭게 제 몸에 남아있는 꽃봉오리도 곱게 꽃을 피우기는 어려워 보였다. 해마다 만개한 꽃을 대가 없이 즐긴 사람으로서 지켜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나무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반듯하게 다듬어진  모습으로 울타리라는 자신의 소명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한순간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한 꽃은 어디에 그 향기를 남겨야 할까? 때늦은 강(強)전정에 잘려나간 꽃봉오리와 고스란히 드러난 나무의 생채기가 꽤 오래도록 잔상이 되어 남았다. 내가 지켜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다 아이와의 일화가 떠올랐다.  


중학생인 첫째 아이는 모든 기계류를 좋아한다. 아장아장 걷던 때부터 시작된 기계사랑은 청소년이 된 지금까지 계속됐다. 긴 세월만큼 관심을 가진 종목도 다양하게 쌓였다. 가정용 전자제품에서 교통수단, 3D 프린터, 카메라 등 아이의 관심은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나뭇가지처럼 산발적으로 뻗어나갔다.  


최근에는 공구와 납땜 기기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 전동드릴이라는 매력적인 종착역에 도착했는데, 우리 집엔 이미 전동드릴이 있으니 그 역에서 하차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상사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매일 유튜브로 드릴 영상을 파기 시작했다. 유명 유튜버의 인기 영상부터, 자막이 지원되지 않는 먼 나라 영상까지 가리지 않고 흡수했다. 어느 날은 덥수룩한 수염의 러시아 아재가 말도 없이 몇십 분간 통나무를 뚫고 있는 영상을 보고 있는 아이를 봤다. 이 정도 정성이면, 별수 없다. 종착역에 한번 내려보라고 하는 수밖에.  


아이는 간절히 원했던 무선 전동드릴을 구입했다. 흥분한 아이는 한 손에 완충된 드릴을 들고 '어디 뚫을 곳 없냐?'는 말을 끝도 없이 해댔다. 그때마다 작동 버튼을 한 두번 눌러 '위이잉~ 위이이잉~' 소리를 내는데, 아이의 눈에 온 집안을 다 뚫어버리고 싶은 열망 같은 것이 보였다.  


아이는 고장난 화장실 문고리를 교체하고, 벽시계의 위치를 내려 달고, 전등 스위치를 교체했다. 그걸로도 몸이 근질근질했는지, 뒷산에서 굵은 나뭇가지를 잔뜩 주워 와 나사를 박아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호기심까지 발휘된 날은, 드릴 끝에 수세미를 끼워 화장실 바닥을 한 시간을 문질러댔다.  


배움의 신이 이런 아이의 열정에 감복했는지, 마침 학교에서 목공 작품을 만드는 수업이 진행됐다. 아이는 광분했다. 자기는 목제 스피커를 만들 거라며 열심이었다. 설계도를 스케치하고 수치를 계산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을 투자했다. 아이의 설계도는 단순한 작업을 넘어서는 내용들이 많았다. 목재 내부에 원형의 구멍을 뚫고, 경첩을 달고, 스피커 부품을 고정하는 등의 작업들이 포함돼 있었다. 학교에 필요한 부품이 없다며, 아이는 철물점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일부는 온라인으로 주문도 했다. 점점 이것이 과연 중학생이 수업 시간에 할 수 있는 작업인지 의문이 생겼다. 다른 아이들은 뭘 만드는지 궁금했다. 친구들은 선생님이 샘플로 보여주신 연필꽂이, 모니터 받침대, 책꽂이 같은 것들을 만든다고 했다. 선반으로 목재를 자르고 못을 박비교적 간단한 작업으로 제작이 가능한 것들이었다.  


친구들의 작품은 빠른 진척을 보였지만, 아이의 작품은 달랐다. 수많은 추가작업이 필요했고, 그중엔 시간이 꽤 소요되는 섬세한 작업들도 많았다. 숙련된 기술자가 아니기에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은 덤이었다. 때론 부품을 기다리느라 작업이 지체되기도 했다. 아이는 매일 배송추적 버튼을 누르며, 부품을 실은 배가 지금 여기 있다고 바다 위를 한 점을 가리키곤 했다.


과한 운동 후, 침대에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던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나의 몰골을 보고 웃어댔다. 옆으로 와서 너도 좀 자빠지라고 손바닥으로 침대를 두어 번 두드렸다. 책가방을 던지고 함께 드러누워 휴식하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 부품이 아직도 바다 위에 있어. 엄마는 내가 호구 같아?"


'호구'라는 짧은 단어 속에, 아이가 느끼는 감정의 동요가 대번에 이해됐다. 아이는 지쳐 보였다. 빠른 속도로 완성되어 가는 친구들의 작품을 보며 허탈했을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자처해서 하느라 돈 들이고, 시간 들이고, 골치까지 아프니 '호구' 같은 짓을 하고 게 아닐까 자문하는 사태까지 온 것이다. 나는 그동안 아이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말하지 않았던 진심을 꺼내 보였다.  


"엄마는 네가 너무 멋있어. 내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정말 대단해 보여. 엄마는 네 나이 때 뭘 좋아하는지 몰랐거든. 그리고 좀 좋아하는 게 생겨도, 너처럼 그렇게 치열하게 파고들어 본 적이 없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하는 거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멋있더라. 그걸로 꼭 나중에 뭘 해야지가 아니라 그냥 좋아서 하는 사람.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파고드는 사람 있잖아. 이번에 목공 작품 만드는 거 보면서 또 반했어. 나한테는 멋있는 사람이야. 너."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 이야기의 방향은 아이를 위로하기 위함에 있지 않았다. 그저 진심을 내보이고 싶었을 뿐.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우리는 서로의 표정을 살피지 않았다. 말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아이 얼굴을 봤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별말이 없던 아이는 해야 할 것이 있다면서 몸을 일으켜 제 방으로 갔다.  


목공 수업은 끝이 났고 아이는 스피커를 완성했다. 수업이 다 끝났는데도 아이는 손잡이를 더 만들고 싶다며 친구들에게 쓰고 남은 목재 자투리를 얻어왔다.


"사실 이쪽은 좀 잘못 잘랐어. 더 작게 잘라야 했는데... 그리고 여기는 나사가 수평이 좀 안 맞는데 티는 많이 안 나지? 여기는 사포질 좀 더 해야 되는데……"  


고해성사하듯 자기가 만든 목제 스피커의 결점을 나열하며 아이는 실쭉 실쭉 웃었다.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자기 작품이 마음에 드는 것 같다.


아이가 한 것은 '몰입'의 행위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한 없이 쓸 때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일 자체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삶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된다. 체력과 정신력이 조화롭게 집중될 때 삶은 마침내 제 스스로 힘을 얻는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목공 수업이 아이의 마음에 불씨를 겼다. 아이는 가냘픈 잔가지를 하나하나 주워 불씨를 살렸다. 제법 굵은 가지로 불길을 키워 비로소 온기가 느껴질 만큼의 모닥불도 피워냈다. 타닥타닥 뜨끈하게 타오르던 모닥불이 빗방울에 위태롭게 흔들렸을 때, 나는 그 비가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이기를 바랐다. 아이가 피워낸 모닥불을 꺼버릴 만큼 오래 머물지 않기를 응원했다. 모처럼 맞이한 행운 같은 몰입의 순간이 계속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아이에게 몰입의 순간이 계속되길 바랐듯, 쥐똥나무에게 지켜주고 싶었던 순간도 다르지 않았다. 몸과 마음을 여한 없이 쓰는 순간. 삶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되는 순간. 찬란하게 꽃 피울 그 순간. 그런 순간을 강탈당하지 않도록 내년 4월엔 조금 덜 무심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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