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으로 주문한 돼지갈비가 담긴 택배 박스를 개봉하며 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스티로폼 박스를 열자, 아기얼굴스티커가 붙은 제품과 손편지 그리고 수제 식혜가 보였다. 여기까지는 온라인 쇼핑을 하다 보면 운 좋게 마주하기도 한 친절 정도였다. 나의 감탄사를 불러일으킨 주인공은 함께 동봉된 생화 한 송이었다. 생화는 얇은 뽁뽁이에 한 겹 덤덤하게 둘러싸인 채, 그 어떤 외상도 없이 싱그러웠다.
'신선한걸? 돼지갈비와 꽃이라..., 일종의 감성 마케팅인가?'
나는 순간 돼지갈비를 품은 평범한 스티로폼 박스가 우리 집에 도착하기까지 거쳤을 험난한 여정을 떠올렸다. 생화가 담겼다는 그 어떤 힌트도 없는 이 박스는 수많은 택배 박스와 함께 차량에 오르고 내렸으리라. 그러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 밀고 밀리면서 이동했을 것이다. 그다음엔 또다시 차량에 오르고 내리길 반복했겠지. 이 과정에서 우연이라도 혹은 단 한 번이라도 박스가 뒤집혔다면 개봉의 순간, 감탄이 아닌 탄식을 불러왔을 것이다.
우리나라 택배 문화는 빠르고 편리하기로 유명하다. 그만큼 이용자도 많으니, 물류센터에서 매일 택배 물품이 상하차 되는 장면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는 쉴 틈이 없이 돌아가는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주인공(찰리 채플린 분)이 나온다. 가려운 겨드랑이를 긁을 시간도, 얼굴에 붙은 벌레를 떼어낼 시간도 없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쏟아져 나오는 제품의 나사못을 조이던 주인공은 결국 과로로 이상 증세를 보인다. 나사못처럼 동그란 것만 보면 자기도 모르게 돌려서 조여버리는 것이다. 옷에 달린 단추, 동료의 동그란 코 같은 것들 말이다. 1937년에 제작된 영화로 80여 년의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풍자하는 현실은 낯설지 않다. 그러니 택배를 받을 때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치열한 여정 끝에 내 손에 와닿았으니, '돼지갈비와 꽃'이라는 다소 생소한 조합과 '꽃의 무사 귀환'이라는 반가운 소식에 나는 감탄했다. 예상치 못하게 조우한 생화는 수선화과의 핑크빛 알스트로에메리아(Alstroemeria)였다. 18세기 남아메리카에서 활동하던 스웨덴 선교사 알스트로머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꽃의 구근을 가져가 유럽에 알려진 꽃이다. 그래서 꽃의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붙여졌다. 지금은 식물방역법을 위반한 심각한 밀수 행위이지만, 그 당시엔 이런 방식으로 꽃의 품종이 전파되는 경우가 꽤 많았다. 수묵으로 그러데이션을 연출한 것 같은 꽃잎의 빛깔을 보고 있자니, 알스트로머가 왜 이 꽃을 좋아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다 한 꽃잎에 시선이 멈췄다. 알스트로에메리아의 꽃을 자세히 보면 다른 꽃잎과 구별되는 유난히 화려한 점무늬를 가진 꽃잎이 있다. 이것은 '허니 가이드(Honey guide)'이다. 허니 가이드는 벌이나 나비에게 꿀이 있는 부분을 정확하게 안내하는 이를테면 눈에 띄는 이정표 같은 것이다. 그러니 한 꽃 안에서도 다른 부위와 구별되도록 색을 달리하거나 점이나 줄로 된 무늬를 갖는다. 다른 꽃잎으로 가지 말고 이 꽃잎을 따라 쭉 내려가라는 친절한 손짓이다. 허니 가이드를 쭉 따라가다 보면 꽃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꿀샘에 도착하게 되고, 비로소 맛있는 꿀을 맛보게 된다. 즉 곤충에겐 꿀샘으로 직행하는 실크로드인 셈이다.
허니 가이드는 달콤한 유혹 혹은 친절한 내비게이션이 되어 외친다.
"이쪽으로 쭉쭉 들어오시면 됩니다. 오라이~ 오라이~"
굳이 허니 가이드를 준비한 알스트로에메리아도, 생화까지 챙겨 보낸 돼지갈비 사장님도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닐까?
사실 꽃에게도 이유는 있다. 알스트로에메리아는 충매화다. 충매화는 벌과 나비 같은 곤충을 매개로 꽃가루받이를 한다. 그러니 충매화엔 곤충이 꼭 필요하고, 이들을 불러들일 아찔한 유혹의 도구를 준비해야 한다. 곤충의 눈길을 사로잡을 화려한 꽃잎과 후각을 자극하는 향기, 달콤한 꿀이 그것이다.
허니 가이드를 따라 곤충이 이동하다 보면 수술과 암술을 마음껏 건드리게 된다. 꽃의 입장에선 곤충이 꽃 깊숙이 들어올수록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일부 꽃가루는 곤충의 몸통과 다리 곳곳에 붙어 다른 꽃으로 자유롭게 이동되기도 한다. 꽃은 곤충에게 고작 꿀을 주었을 뿐인데, 자손 번식이라는 원대한 사명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 꽃의 입장에서는 허니 가이드를 제공하는 친절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나는 이 허니 가이드라는 자연적 특성이 마케팅의 생리와 닮은 구석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매자는 구별성을 가진 허니 가이드로 구매자를 끌어당기며 상품을 제공하고, 구매자들은 상품평과 입소문 그리고 재구매라는 꽃가루를 실어 나르며 번성의 핵심 역할을 하니 말이다. 화려한 허니 가이드를 가진 꽃에 곤충이 끌리듯, 택배 박스 안에 동봉된 사장님의 눈에 띄는 정성에 나는 이끌렸다.
나는 꽃에 취한 곤충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사장님의 허니 가이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먼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돼지갈비 온라인 판매처에 다시 접속했다. 꽃을 동봉한 이 회사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막상 구입할 땐 대충 훑어보았는데, 다시 보니 사장님이 스티커의 사진 속 아기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상품평을 살펴보니 어떤 이는 국화를 누구는 장미를 받았다고 한다. 사장님은 계속해서 제품과 함께 꽃을 보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음 허니가이드에 따라 나는 알스트로에메리아를 다듬어 병에 꽂았다. 식탁 위에 올려두니 꽃이 가진 은근하고 강력한 힘이 발휘됐다. 작은 꽃 하나 올렸을 뿐인데,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멩이가 수면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듯 공간이 순식간에 근사해졌다.
무심하게 담긴 수제 식혜를 한 모금 마시고, 아기 얼굴 스티커가 찢어질세라 조심하며(이것 또한 누가 시키지도 않았다.) 포장지를 뜯었다. 인쇄하지 않고 볼펜을 꾹꾹 눌러쓴 것이 분명한 손편지를 읽으며, 드디어 대망의 돼지갈비를 구웠다. 이쯤 되니 급기야는 '돼지갈비가 혹시 맛이 없으면 어쩌나?' 내 것 아닌 걱정을 사서 하기 시작했다. '부디 맛있어서 이분 사업이 번창해야 할 텐데...' 이 정도면 오지랖도 태평양이다.
돼지갈비는 먹어 치운 지 2주가 다 되어간다. 그런데, 알스트로에메리아는 아직 싱싱하게 우리 집 식탁을 채우고 있다. 맛에 대한 기억은 희석되어 가는데, 꽃이 주는 아름다움은 매일 새것처럼 산뜻하다. 나는 식탁에 앉는 하루 세 번의 식사 시간 동안 꽃을 보며 돼지갈비를 떠올린다. 어쩐지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조건반사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사장님의 감성마케팅은 참으로 통했다.
나는 마음에 쏙 드는 허니 가이드를 따라갔다. 가는 길에 귀여운 아기 얼굴을 봤고, 단정한 맛의 식혜도 먹었고, 어여쁜 꽃으로 식탁까지 장식했다. 제대로 된 허니 가이드를 만난 꿀벌은 오래도록 꽃에 머무르며 달콤한 꿀을 즐기는 법이니, 이러한 나의 반응도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리라. 이제 남은 것은 그 친절한 꽃의 번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