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 S씨. 요즘도 잘 지내고 계시지요. 마지막으로 편지를 주고받은 지도 벌써 넉 달을 가득 채웠습니다. 곧장 답장을 보내려던 것이 생각이 많아져 적당한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이제는 벌써 완연한 봄입니다. 혹여 그대 마음이 아직도 겨울길을 걷고 있을까 하여, 봄소식도 전할 겸 용기를 내었습니다. 내 늦은 답장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길 바랄 뿐입니다.
글이 잘 나아가지 않는다구요. 당신 스스로 내놓은 분석에 나도 일부 동의합니다. 그것은 필시 부끄러움의 몫이 클 것입니다. 목소리 내는 일이 부끄럽고, 간신히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더라도 그 결과물을 견딜 수 없으니 붙잡고 있는 글이 더디게 나아갈 수밖에요. 섬세한 그대 성격에 또 얼마나 여러 밤을 자책과 원망으로 지새웠을지, 편지를 읽는 내내 그대를 생각하며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사랑, 우리 삶 전체를 놓고 보건대 부끄러움이란 분명 실보다는 득이 더 많은 감정입니다. 작가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요. 부끄러워할수록 말을 아끼게 되고, 말을 아낄수록 좋은 글에 가까워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움이 많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고, 이 귀한 감정은 앞으로도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분명.
다만 엄밀히 따지자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넘어 절제라는 단어에 도달해야 하리라 믿습니다. 부끄러움이 수동적 감정이라면, 절제는 능동적 행위입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러합니다. 부끄러움이 너무 커져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 즉 자기 목소리를 아주 앗아가는 상황이 우리 앞에는 종종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글은 '부끄러워하는 글'이 아니라, '절제하는 글'입니다.
절제하는 글이 좋습니다. 어느 종류의 글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설명하는 글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설명하는 글을 적는 이유는 독자에게 깨달은 바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깨달은 바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건 위험한 시도입니다. 작가에게도 위험하고, 독자에게도 위험합니다. 작가에게 위험한 이유는―적어도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부끄러움을 자극하여 글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 방해하기 때문이고, 독자에게 위험한 이유는 직접 묘사된 깨달음에는 창조적 여유 공간이 적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명하는 글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정리된 깨달음보다는 날 것 그대로의 원재료를 묘사하는 데에 집중을 해보십시오. 직설보다는 은유와 상징을 사용해 보십시오. 혹은 형식을 제한함으로써 내용의 절제를 강제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깨달은 바를 곧장 토해내고 싶은 마음을 한숨 가라앉히고, 한 걸음씩 적어내는 연습을 하다 보면 곧 당신의 부끄러움도 만족할 만한 좋은 설명글이 나올 것입니다.
한편 감정을 다루는 글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글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는 결국 다른 누군가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함입니다. (그 상대가 어느 때에는 독자이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나 자신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절제를 하지 않는 감정글에는 상대를 위한 배려 공간이 없습니다. 따라서 상대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가 유독 괴롭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당신으로선 정제되지 아니한 감정투성이 글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겠지요. 설령 그것이 가장 이기적인 목적에서 쓰인 것이라 하여도 말입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또 그 과정에서 다소 적나라한 표현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적나라한 순간에도 작가 스스로는 잠잠한 상태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공감하는 글이 잘 나아가지 아니할 때에는 잠시 멈추고 산책을 다녀와 보십시오. 혹은 명상도 좋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보고, 그 목소리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계속 불순물을 제거해 보십시오. 곧 당신의 부끄럼도 만족할 만한 담백한 글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설득하는 글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설득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작가의 자기 확신을 독자에게 전하는 것,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생각이나 태도를 바꾸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재촉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 강한 자기 확신은 상대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뿐이지요. 설득하는 글이 자기 의도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만약 그대 부끄러움이 설득하는 글의 작성을 방해하고 있다면 낙담하기보다는 차라리 기뻐하십시오. 우리네 부끄러움은 정제되지 아니한 자기 확신이 입 밖으로 나오는 걸 자제시키고 있을 뿐이니 말입니다.
자기 확신을 곧바로 내보이지 말고 그러한 확신에 도달하게 된 구체적 경위를 담담히 나열해 보는 건 어떠한지요 사랑. 독자 스스로 그러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제안하는 내용이 일방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공감대를 형성한다거나, 곧장 관념으로 뛰어들기보다는 독자의 상상력이나 욕망을 자극해 보십시오. 자기 확신과는 건강한 거리감을 확보한 채, 각 장면을 개연성 있게 나열하다 보면 어느덧 작가와 독자 양쪽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근사한 제안이 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다시 한번, 넘치는 부끄러움에 가끔 목소리가 막혀도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궁극적으로는 부끄러움을 넘어 절제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가 목표하는 바는 '부끄러워하는 글'이 아니라, '절제하는 글'이므로.
혹여 부끄러움에서 절제로 넘어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작가의 본래 직분에 대해 고민해 보십시오. 작가란 본래 해설자가 아닌 관찰자, 즉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적어내는 사람입니다. 물론 훌륭한 관찰자가 되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탁월한 해설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자기만의 해설을 구축한 뒤에는 (거기서 멈추지 말고) 다시 부지런히 관찰자로 돌아가야 합니다. 해설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바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 위로를 건네고 싶은 마음, 변화를 촉구하고 싶은 마음 등은 분명 그대가 품은 훌륭한 목표이지만, '깨달음', '위로', '변화' 그 자체는 세계에 대한 당신의 "해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컨대 작가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깨달음에 이르게 된, 혹은 잠잠함에 달하게 된 바로 그 "장면"을 그저 담담히, 개연성 있게 나열하는 것뿐입니다. 내 사랑, 당신이 언젠가 세계에 대한 그대의 해설과 그 뿌리가 된 장면을 온전히 구분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대 이야기가 마냥 남 일 같지 않아 짧게 줄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많은 사랑을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이쪽은 봄소식이 이토록 만연하니, 그쪽도 이 편지가 도착할 즈음이면 온 대지가 초록과 노랑으로 물들어 있을 테지요. 내 몫까지 한껏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내 사랑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 다시 편지해 주기를. 나는언제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대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