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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민 Feb 02. 2021

베지밀은 죄가 없다.

"B를 마신다면, 믿을 만한 사람이지."


베지밀은 죄가 없다.


프라하는 이제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후디를 찾아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날씨가 제법 추워졌다. 오늘 아침에는 올 들어 처음으로 물을 데워 마셨다. 가끔 이럴 때면 한국의 편의점에서 파는 베지밀 생각이 날 법하다. 가정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법한 그 따뜻하게 데워주는 기계(도무지 명칭이 떠오르지 않는다) 안에 있는 베지밀. 나는 이 베지밀을 마주할 때마다 수만 번 고민하고는 했었다. '오늘은 A로 갈까, 아니면 B로 갈까'하고 말이다. 물론 종종 베지밀을 마시는 사람들은 각자의 선호가 있었던듯하지만, 나는 사실 그 차이를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잘도 지금까지 '베지밀은 A가 진짜지, 혹은 원래 B를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며 타인에게 허세 부려왔었던 듯하다. 아마도 나는 다른 사람의 눈에 항상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 보이길 바라 왔던 것인지 모르겠다. 더 나아가서는 같이 있는 사람과 하나의 공통분모를 찾고 싶거나, 혹은 거리를 두고 싶었을 때 자연스레 베지밀을 이용해왔는지도 모른다. 베지밀 하나를 마시며 'B를 마시다니, 정말 신뢰할만한 사람이로군!'따위의 생각은 누구도 할리 없는데 말이다. 어찌 되었건 베지밀은 죄가 없다.


잔뜩 베지밀의 이야기를 한 주제에 죄 없는 베지밀에게 더욱 미안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하고 싶은 것은,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베지밀보다 레쓰비를 더 즐겨마셨던 것이 틀림없다. 더 싸고 더 달달한 레쓰비는 비록 문병 가는 길에는 베지밀만큼 선택을 받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 이상의 고유 감성을 가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레쓰비를 주머니에 넣어두고 손을 녹이던 습관이나, 이성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전달하는 그 느낌으로는 역시 레쓰비만 한 것이 없겠다 싶다.


특히나 레쓰비는 올곧은 성격으로 우리에게 A냐 B냐 하는 선택권 따위는 주지 않는다(물론, 후에 코코아 라던지, 대용량이 출시되었지만). 유리병에 담긴 베지밀의 매너 좋은 따뜻함이 아닌, 꺼내자마자 어처구니없는 뜨거움이 전해져 카운터까지 가져가는데 소매로 집어야 하는 레쓰비의 그 성질머리가 제법 카리스마 있게 느껴진다. 그러니 나는 레쓰비보다 베지밀을 건네는 남자가 더 센스 있게 생각되기도 하는 이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외에 있는 지금은 레쓰비나 베지밀의 종류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가 되어버렸다. 일단 그들의 선택에 앞서, 레쓰비나 베지밀이라는 생명체(생명체라고 하고 싶다) 자체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편안한 운동복 차림으로 걸어 나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차를 타고 한인마트로 떠나야만 만날 수 있는 귀중한 보급품이 되어버렸다. 내 기억으로는 분명 아내는 베지밀 B를 더 선호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우리는 베지밀의 선호 따위를 논할 시간이 없다. 보이는 대로 이것들을 허겁지겁 장바구니에 담기 바쁠 따름이다.






이 글은 작년 겨울이 시작되었을 무렵 작성했던 것 같네요.

그리고 그 시점과 오늘 사이의 언젠가 베지밀 A와 B의 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베지밀 A는 Adult로 조금 더 고소한 맛을 내고,

베지밀 B는 Baby로 보다 달달함을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저는 요즘 검은콩 베지밀을 즐겨 마시고 있습니다.

네.. 저의 선호보다는 일단 검은콩 베지밀이 한인마트에 들어오기 때문이죠.


하루 지난 2월의 시작입니다.

1월은... 새해의 기념으로 사람들도 만나고 못다 한 정리도 하고

이것저것 바쁘고 의미 없게(?) 지나갔지만, '이제 2월 본격적인 새해의 시작이지'

마음을 먹게 되는 진짜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만 그런가요?ㅠ_ㅠ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식상하지만 "파이팅"이란 말 입죠.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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