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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초코숲 Sep 20. 2022

12. 때로는 마시멜로를 당장 먹어보자

잃어버린 욕망 찾아보기

정신과 진료 첫날 문장 완성 검사를 진행했었다. 거침없이 적어내다 멈칫했던 문장이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_____'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답을 적었다.


'뭘까?'



어린 시절부터 무언갈 갖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님이 사주신다고 하는 물건도 몇 번 필요 없다며 거절한 기억이 있다. 그렇다고 꼭 필요한 것만 산다는 미니멀리즘 감성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 좀 더 옳은 표현이다.


불필요한 지출을 하지 않아 좋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원하지 않는 선택권이 주어져 오히려 당황한 적이 많았다. 가끔은 병적인 수준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할 정도였다. 가끔 편의점에서 원하는 과자를 고르는 것이 어려워, 10분이 넘도록 주위를 서성거리곤 한다. 하나를 집을 때마다 '이것보다 더 맛있는 건 없나?' '이거 먹으면 살찌는데...' '1+1 하는 비슷한 걸 찾아보자'라는 마음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여유가 있을 때 생각을 하거나 명상을 하면서 내가 가진 결정장애, 아니, 선호가 없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선 선천적인 기질이 그랬다. 부모님께서는 가끔 로봇 하나 사달라고도 말하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을 술안주 삼아 이야기하시곤 한다.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더 생각해 보면, 조금은 힘든 가정형편을 의식하면서 욕망을 포기한 경험도 있었다. 욕구를 줄여버리면 그것을 충족할 필요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조금 더 마음을 살펴보니, 대학교 시절을 거치며 증상이 심해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 시절, 지금의 상태에 준할 정도로 멘털이 박살나버린 일이 있었다. 동아리의 회장이 되었는데, 여러 가지 일을 겪고 선배들로부터 그만둬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돌이켜보면 바로 '수치심'이다. 회장에서 '잘렸다'는 사실이 주는 쪽팔림과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한 학기 내내 계속되었다. 지금처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당시에는 정신과 진료는 정신과 진료는 생각도 안 했으니 더욱 고통스러웠다. 새벽에 깨는 게 너무 무서워서, 졸려도 12시 전에는 잠을 자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시간이 약이 되어 상처는 점차 아물어갔지만, 깊은 상처는 흉터를 남기는 법이다. 삶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였기에 상처가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반작용으로 인해 조금 지나칠 정도로 삶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나의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허무주의적인 생각이 삶을 지배했다. 의미를 찾지 못했기에 욕구를 충족할 노력을 하지 않았고,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점차 욕망을 생각조차 하기 힘들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제대로 고르지 못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문장 완성 검사를 보시던 선생님이 놀라셨다. 왜 이렇게 썼냐는 질문에 정말로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답했다. 선생님께서는 우선 사소한 것에서부터 본인의 취향과 선호를 파악해 보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사랑과 관심의 초점을 조금은 스스로를 향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과 함께.


책과 유튜브의 바다에서는 결정장애와 관련된 내용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지난 글에서 이미 이야기한 자기혐오 이외에 '완벽주의적 성향''인정 욕구'가 작용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선, 완벽주의적 성향이 나타나면 스스로의 사소한 선택마저 완벽한 선택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과자를 집으면 '저게 더 맛있지 않을까?' '맥주랑 먹으려면 다른 게 가성비가 좋지 않을까?' '그런데 많이 먹으면 살찌니까 칼로리는 낮아야 하는데...'라는 고민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이렇게 마음의 힘을 쓰게 되면 두뇌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편 '인정 욕구'가 지나치게 되면 혹시나 나의 선택이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지레 불안해하게 된다. 이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아예 선호를 타인에게 맞춰버리는 것이다. 직장 상사와의 자리야 다른 문제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편안한 자리에서까지 불안함이 생기다 보니 스스로의 선호를 점점 잃어가면서 타인에게 맞추려는 생각만 남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이해조차 하기 힘들겠지만, 숨겨진 스스로의 욕망을 찾아나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를 위해서 요즘 꽂혀있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바로 '취향'이다. 옷, 음식, 인테리어 소품까지 무엇에도 나의 취향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제부터라도 취향을 발견해보려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나쁘게 보면 자본주의가 원하는 소비 인간이 되는 길이다. 그렇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주체성을 찾는 것이 지금은 더 중요했다.


이제는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않던 파인 다이닝에 가끔씩 방문한다. 평소와는 다른 음식을 먹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식감과 음식 종류를 알아가게 된다. 옷이나 신발의 경우에도 가격에 얽매이던 과거에서 벗어나 나와 어울리는 아이템인지를 살펴보고 있다. 특히 상대적으로 착용감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신발은 발 볼이 넓고 발 등이 높은 특성에 맞는 몇 가지 브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얼마 전, 정말 큰 마음을 먹고 맥북을 구매했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애플 생태계를 체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미 작년 생일선물로 받았던 노트북이 있었기에 솔직히 과소비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맥북으로 글을 쓰는 경험은 분명히 달랐다. 윈도 PC를 쓸 때보다 글에 몰입하게 되는 기분을 느낀다. 아내의 말대로 아마 수십 년간 써 왔던 '일할 때 쓰는' OS와는 다른 신선함이 새로운 경험을 주는 것 같다. 이제야, 업무차 만났던 디자인 쪽 사람들이 모두 아이폰을 쓰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마시멜로 이야기>의 교훈은 '참으면 더 좋은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지금 하나를 먹고 싶은 지, 참고 두 개를 먹는 게 더 좋은지
스스로가 느끼는 진정한 욕망을 알아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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