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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당한 코리안 Oct 30. 2022

가까이서 접하는 미국의 마약, 중독, 범죄, 정신문제

글은 좀 조심스럽다. 


한국 뉴스에 비춰지는 미국은 총기사건과 폭동, 마약, 게다가 인종차별이 판을 치는 곳이다. 일부러 그러려는 지는 몰라도 한국뉴스가 그렇게 보도를 한다. 그래서 미국에 가면 다들 총맞아 죽는지 알고, 인종차별 당하는지 안다. 미국에 가는 우리보고 걱정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한두명이 아니었다.


- 총 안 무서워? 

- 인종차별 심하다는데?  


근데 비슷하게도, 미국 사람들은 우리가 한국 갈 때 큰일 나는줄 안다. 당장이라도 북한과 전쟁이 나는 줄 안다. 그들 뉴스에 비춰진 우리 나라는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보도할 것이, 북한과의 이슈 외에 보도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일 벌벌 떨면서 매일 방공대피 연습을 하는 줄 안다. 근데 과연 그런가? 한국사람들은 전쟁은 다른 나라 이야기, 역사책 이야기처럼 느껴질 뿐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안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장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내가 타고 다니는 지하철, 내가 다니는 회사, 애들이 다니는 학교는 절대 불멸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오래 살아본 나로서, 미국은 그냥 여느 나라와 같다. 그냥 별일 없이 산다. 그러다 별일이 나면 잠깐 소란스럽지만 또 다시 잠잠해진다. 모두들 자기 사는데 바쁘고 자기가 사는 생활반경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 신경쓸 뿐이다. 미국인들에게도 테러, 총기사건, 인종차별, 마약, 범죄,  이런 문제는 먼 다른나라 이야기일 뿐이고 단지 지표상의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그렇다. 내가 사는 곳과 주변 사람들.. 넓은 집과 드넓은 자연 속에서 행복해 보이는 미국인들... 특히 중산층 가정들을 볼 때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었고 미국 드라마나 범죄 TV 시리즈물, 뉴스에서나 볼 법한 문제들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최근 이런 문제들이 생각보다 가까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낀 일이 있었다. 


직접 경험한 이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이다. 내가 직접 만나고 보고 만진 사람들. 


이야기 세개와 또 이야기 한개


우리가 한동안 다니던 미국인 교회에서 틴 챌린지 Teen Challenge 라는 단체를 초대했다. 


세 명의 멤버가 와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모두 문신을 했고 두명은 머리가 짧은 머리를 했다.

얼굴을 보니 인생의 굴곡을 산 티가 났다. 다들 30대 후반 처럼 보였다. 근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인 듯 하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 


이들 세 명의 인생 이야기


첫번째 이야기


난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학대를 당하고 유기를 당해서 위탁시설을 전전하며 살았다. 

나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사랑받지 못할만하다고 믿으며 그러면서도 남자들의 사랑을 갈구하고 마약과 알코올 중독으로 인생의 쓴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했다. 

인생을 대충 살면 되지, 일부러 노력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인생을 막 살았다고... 

그리고 자살충동을 항상 느꼈다. 감옥을 오고가며 그게 인생이지 하고 살았다. 


감옥에 있을 때였다. 한번은 사촌한테 전화가 왔다. 지금은 목사가 되어있는 사촌이었는데, 틴 챌린지 단체를 소개시켜줬다. 그 단체에서 졸업하고 나면 자기가 일을 주선해주겠다고 해서 가게 되었다. 

틴 챌린지에서 4개월이 지났다. 그곳에서 따뜻한 보살핌을 많이 받았다. 


내 존재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놀라운 존재이며 나를 놀라운 계획과 목적을 위해 가지고 계심을 믿는다. 

이 메세지를 나와 같이 불우한 시절을 보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두번째 이야기 

내가 아주 어릴 때에 부모님은 알코올중독자였다. 

그러던 부모님이 술을 끊게 되었고 그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나와 내 동생들은 부모님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어느날 엄마가 아빠보고 "우리 오랜만에 술 한잔 할까?" 했다. 


그로부터 부모님은 다시 술에 쪄들은 삶으로 돌아갔고 우리의 풍족하고 넉넉한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14살에 임신하고 첫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6주 빨리 태어났고 많은 약 문제를 안고 태어났다. 

아이는 내가 키울 수 없게 빼앗겨졌고 나는 그 때부터 극심한 우울증이 시작되었고 마약과 알코올에 쪄들어 살게 되었다. 


내 아들에게 전화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나를 찾아도 난 아들에게 말하기를 거부했다. 

아들을 보지 않고 아들에게 전화하지 않은지 여러 개월, 여러 해가 지나게 되었다.

마약 문제로 감옥에 여러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삶을 반복.  

원래 엄마가 보석금을 내어 나를 빼주었는데,  한 번은 엄마가 보석금을 내주기를 거부하면서 나한테 그랬다. 

이번에는 보석금을 내주지 않겠다고. 감방에서 나오면 "틴 챌린지"라는 단체에 가서 다르게 살라고. 


정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갔을 때 마음이 편했다. 

4개월이 지났다. 난 내가 변화되기를 원한다. 


이제는 아들과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세번째 이야기 

우리 부모님은 마약을 하고 알코올을 했기에 나와 언니 동생은 어릴 때부터 그런 것에 익숙했었다. 

난 여덟살 때 처음으로 마약에 손을 댔다. 주변에 어울리며 다니는 사람들이 다 그런거 하는 사람이었는데, 한번은 마약 거래가 잘못된 일로 내 눈 앞에서 언니가 총을 맞아 죽게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삶을 대충 살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았다. 또 낳고 또 낳았다. 아빠가 달랐다. 


모두 태어날 때부터 마약 성분이 검출되었다. 아이들은 나로부터 빼앗겨 위탁소에 맡겨졌다.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감옥을 들락날락 하며 살고 있는데 한번은 두가지 옵션이 주어졌다. 근처 동네에서 재활프로그램을 가던지 아니면 3시간 떨어진 곳에서 틴 챌린지를 하라는.


틴 챌린지를 하겠다고 했다. 왜냐면 우리 동네에서는 나는 이미 찍혔는데 멀리 가면 아무도 나를 모를것 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이미 나는 신문에도 나고, 범죄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틴챌린지에서 몇 개월을 지냈다.  내 상처가 많이 치유되고 있다. 이 세상에 상처받고 잘못된 환경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내가 쓰임받기를 원한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들의 망가진 인생이 슬프고, 그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자라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거부당했던 그들의 절망적인 인생을 자기의 자녀들에게도 되물려줘야 하는 악순환의 현실, 그들의 인생에서 출구를 발견할 수 없었던 그들의 절망감이 느껴져서 눈물이 났다. 


한편 그들의 인생이 전환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와 힘이 생겼다니, 이 세상에 소망은 남아있구나... 싶어서 또 눈물이 났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자꾸 손이 눈쪽으로 가는 것이... 눈물을 훔치는 것 같았다. 


발표가 끝나고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 난 한국에서 왔어요. 문화는 다르지만 당신들의 이야기는 동감되었어요. 


나보고 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서로 안아주었다. 



마침 그날 내 앞집 이웃 앤이 놀러왔다. 몇 개월만에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처음 만난건 아이들을 통해서였다. 아침에 스쿨버스 탈 때 그 집 딸이 우리 집 쪽으로 건너와서 우리 애들과 같이 스쿨버스를 탔다. 우리 셋째와 학년이 같았다. 애들이 친하게 지내면 좋을 것 같아 건너가 인사했다. 눈이 아주 파랐고 금발인 여자였다. 머리를 뒤로 둥그렇게 말아 손수건 같은 걸로 감싸고 있었다. 실례가 될까봐 망설이다가 물어봤다. 무슨 종교적인 것 같아서 그렇다. 


- 실례일 수도 있는데, 머리에 묶은 건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랬더니, 

- 아, 전혀 실례 아니에요. 종교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제가 얼마 전에 성경을 읽다가 여자는 머리를 가려야 한다는 구절을 읽었거든요. 근데 그게 어떤 뜻인지 이해는 잘 못하지만, 그게 문화적인 걸로 해석해야 하는지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건지. 확실해 질 때까지 우선은 성경말씀에 씌어있는대로 하려구요. 


역시 미국인 답다. 자기 의견이나 신념을 타인에게 말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자기 얘기를 줄줄 한다. 미국인과 얘기하다보면, 자기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즐긴다는 인상을 받는다. 멍석 깔아주면 자기 얘기 잘 한다. 좋은 얘기만 하나? 천만에~ 좋은 얘기 안좋은 얘기~ 다 한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 자체를 별로 신경쓰지 않는거 같다. 


첫번째 만남 이후 길거리를 두고 인사만 하면서 서로 "언제 티타임 가져요~" 말만 했는데 오늘 마침 시간이 되어 우리집에 놀러온 것이다. 갓난 아기를 데리고 왔다. 


그동안 계속 아이들이 돌아가며 아프고 장애인인 남편도 계속 아팠다고 한다. 


그렇다. 남편은 장애인이다. 거동이 불편한가? 싶었는데, 자가면역 쪽에 이상이 있어서 남들은 잠깐 앓고 지나가는 단순 감기도 2-3개월을 몸져 누워있어야 한다고 했다. 작년에 코로나 걸렸을 때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지금도 남편은 병원에 입원해 있고 앤은 혼자 집에서 애를 봐야 하는 때가 많다.


몇 달 후 실제 응급구조차가 불빛을 현란하게 밝히며 건넌집으로 온적이 있었는데, 남편이 들것에 실려 나오는 것을 보기도 했다. 정말 심각하게 건강상의 문제가 있어보였다. 


게다가 이번에 5개월이 된 딸은 감각장애 sensory disorder 가 있어서 거의 매일 테라피를 다녀야 한다고, 그래서 너무 바빴다고 했다. 


우리가 대화 나누던 동안에 카시트에 누워서 자고 있던 아기는 조금 있다 깼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기는 깨자마자 새로운 집 분위기와 목소리와 냄새 등등에 놀래서 울기 시작했다. 


- 이게 감각장애라는건가? 그냥 예민한 것을 일컫는 병인가? 


라고 생각했다. 근데 예민하고 주변의 느껴지는 모든 것에 놀라고 무서워 하는 정도가 확실히 정상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데리고 나가 산책을 하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다. 내 얼굴을 보고도 울던데 조금 지나니 방긋 웃는다. 

다양한 경험을 조금씩 조금씩 하게 해줘야 한다고 한다. 


- 그래... 우리 집에 가끔 와서, 다른 얼굴색깔도 봐보고, 다른 언어도 들어보고, 다른 음식 냄새도 맡아보고... 다른 소리도 들어보고  하렴.

 


산책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더 한다. 내 이야기도 듣고 싶어했다. 난 멍석을 깔아줘도 저렇게 이야기가 줄줄 나오지는 않는다고 느낀다. 나한테 뭔가 이야기를 끌어내려면 질문을 잘 하던지 해야 한다. 왜 난 저렇게 말을 잘 못하지? 영어 원어민이 아니라서 그런가?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사실 난 한국어보다 영어로 수다떠는게 더 쉽다고 느낀다. 그나마 영어로 얘기하면 좀 더 내 얘기가 술술 나오는 것 같다. 한국말이 더 어눌한 나.


그냥, 나는 나에 대해 이야기 하는게 익숙치가 않다. 그렇다보니 이야기는 앤이 더 많이 하고 나는 주로 듣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도 좋았다.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신기했다. 


부모가 원래는 아미쉬 Amish 출신이라고 했다. 아~~ 대박... 그리고 앤이 왜 머리를 손수건으로 가리는지 더 알것 같았다.  


아미쉬는 미국에 몇 군데 공동체를 지어 살고 있는 개혁종파인데, 17세기-18세기의 풍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걸로 유명하다. 단순하게 살고 욕심부리지 말자는 주의로 사는 아미쉬인들. 이들은 세탁기나 에어컨 같은 현대문명을 거절하고  자동차 대신 마차를 몰고 다닌다. 이들이 만든 빗자루 같은 손공예품이 질이 좋아서 사람들이 많이 산다.  잼 같은 음식도 아미쉬 음식이면 믿을 수 있다고 하여 인기가 많다.  


우린 7년 전에 펜실베니아 주의 랭캐스터라는 아미쉬 마을에 갔었는데 돈 내고 그 동네를 투어할 수가 있었다. 투어하다가 배운 것들. 냉장고와 세탁기는 이제 허용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젊은 세대가 아미쉬를 많이 떠난다고 했다. 앤의 엄마 아빠도 이렇게 아미쉬를 떠난 것이다. 


아미쉬 마을 투어 갔다가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근처 식당에 가면 아미쉬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갔는데, 식당에 들어가는 순간 그 안에 있던 아미쉬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우리가 메뉴를 시키고 먹는 내내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던 그들. 우리는 그들을 구경하러 왔는데 도리어 우리가 구경당한 셈이었다. 아주 불편했다. 한편, 그들도 그런 불편함을 느끼겠지 싶기도 했다. 외지인들이 자꾸 와서 자기네 집과 동네를 기웃기웃할 때  별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투어 비용 받잖아. 우리도 식사비 공짜로 해주면 어떨까? 동양인 구경을 실컷 시켜준 댓가로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기서 먹은 독일식/더치식의 감자와 고기 샌드위치는 맛있었다. 


앤의 자기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앤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참 기구한 삶을 살았다... 


앤 남편은 부모님이 둘다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사탄을 섬겨야  된다는 둥, 엉뚱한 소리를 하던 이상한 아버지는 결국 자살을 하고 말았다. 남편은 그에 대한 트라우마가 컸지만, 어찌어찌 잘 극복해서 견뎌냈다고 한다. 


그리고 증권회사에서 일하던 한 때 잘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병이 도지는 바람에 일도 그만두고 집에서 쉬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앤도 두번째로 결혼했는데,  전 남편은 소시오패스였다고 한다. 남의 고통받는 것을 보고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것이 소시오패스라고, 그 남편으로부터 도망치듯 헤어졌을 때 모두들 자기를 탓했다고. 그만큼 남편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내의 입장만 들을 순 없지만, 전남편이 이상하긴 했나보다. 

 

이혼한 후 2년간 혼자 지낼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고 한다. 자기는 남편을 만난게 너무 감사하단다. 첫째 아이도 (알고보니 첫째가 위탁아동으로 그 당시 입양 수속 중이었다. ) 문제가 많고 발달장애를 보이고, 막 태어난 아이는 계속 울어대고 밤에 안자고 울지만, 자기들은 항상 감사하단다. 남편이 얼마나 훌륭한지 나한테 계속 얘기했다. 둘이 결혼한지 2년이라고 하는데 둘은 아무래도 신혼 맞나보다. 알고보니 앤이 나보다 열살이 더 젊었다. 그런데 풍만한 몸매에 성숙해 보이는 표정으로 난 나랑 나이가 비슷한 줄 알았다. 



앤이랑 시간을 보내면서 그날 오전에 들었던 틴 챌린지 멤버들이 생각났다. 다들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았구나 싶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가정이 건강하지 않을 때, 우리를 지켜줘야 할 부모가 정상적이지 않을 때 자녀들이 많이 망가지게 된다는 거. 그리고 그것이 우울증 같은 정신적인 질환으로 발현하던지 심하게는 신체적으로도 발현된다는 거.  (앤 남편이 자가면역을 앓고 그 딸이 감각장애를 앓는다는게 가족으로 부터 온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일거라는 직감이 든다.) 그리고 한번 불행의 굴레로 떨어지면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라는 경고를 받는다. 


그리고 또 한가지.. 미국은 앗따 스케일이 크다. 한국도 청소년의 비행이 심각해지고 있다지만, 미국은 뻑하면 마약으로 치닫는다. 한국인 정서도 불안해서 우울증 공황장애가 아주 흔해지고 있는데, 미국은 아예 소시오패스까지 가는구나. 


사실 이런 말은 안해도 될 것 같다. 이 이야기로 인해 미국에 대한 편견이 굳어질까봐. 


근데 이건 확실한거 같다. 그 정도를 떠나 가족은 정말 사회의 가장 큰 기둥이자 기본적 요소라는 것. 


부부가 이혼하지 않고 살고 건강하게 산다는 거 만으로 자녀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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