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세상 가서도 나를 아침마다 깨우는 남편의 목소리
올린
미국 이민 30년 차.
88년.
우리는 항상 가난했다.
남편은 빨래일 청부소일도 해보고 택시 운전기사도 해보고,
아내는 간호사 자격증을 따서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생활이 조금 안정되었다.
첫째를 낳고 5년 후에 둘째를 낳고 7년 후에 셋째를 낳았다.
-우린 원래 네명 낳고 싶었는데, 애 세명 터울이 너무 많이 져서 더 낳기가 힘들었죠. 우린 전혀 피임이나 그런거 안했어. 그냥 애가 오랫동안 안생겼어요.
막내가 태어났을 때 첫째가 12살이었어요. 기저귀 갈고, 애 먹이고 애 씻기고.. 그러는걸 첫째 둘째가 했지. 그래서 난 편했어요.
아이들이 너무 이뻤다. 아이들이 매주마다 엄마 아빠 데이트 나가라며 자기들 용돈을 모아서 엄마에게 줬다. 그럼 우리는 그 걸로 맥도날드에 가서 이야기하곤 했다. 그렇게 금슬이 좋은 부부가 없다고 주변에 명성이 자자했다. 두 부부는 각각 형제모임의 리더로 자매 기도모임의 주축으로 섬기며 가정을 열고 음식을 하고 자식들 친구들도 초대하고, 항상 사람들이 오고나가는 그런 가정 교회생활을 행복하게 했다. 그렇게 미국 이민생활을 30년 넘게 하니 첫째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취업을 하고 둘째는 대학교에 가고 고등학생인 막내만 집에 있게 되었다.
2020년 코로나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터졌다. 전국이 이 mysterious 한 바이러스 앞에 두려움에 떨었다. 급기어 텍사스에도 코로나 환자가 생기고 올린이 일하는 병원에도 코로나 환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무도 코로나 병동에서 일하는 것을 원치 않는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미국인들 간호사들은 코로나 병동에 배정될까봐 항의하고 병원을 그만 두겠다고 엄포를 놓는데, 드센 그녀들을 코로나 병동에 배정하는 것은 관리자의 입장에서도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이었을 터. 평상시 조용하고 잠잠한, 영어 잘 못하는 외국계 간호사들을 배정하는 것이 가장 나은 옵션이었을 지도 모른다.
올린이 코로나 병동으로 배정되었다. 코로나 초창기라서 의사들 조차도 무엇을 어떻게 조치해야할 지 전혀 아이디어가 없었을 때였다. 그저 환자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 주는 것 뿐이었다. 한번 그 병동에 들어갈 때마다 멸균복을 우주복처럼 차려입고, 두려운 마음을 다잡고 들어가야 했다. 다른 간호사들은 물만 던져주고 휙 나오는데, 올린은 들어갈 때마다 한마디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가족들과 분리되어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병동에서 일하다 결국 아내가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들 세명 모두 걸렸다. 아직 감염이 안된 남편은 골골거리며 누워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약을 사서 먹이고 병간호를 지극정성으로 했다.
그러다 몇일 지나자 남편도 코로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직 나머지 가족도 아파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 남편은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호흡에 곤란을 겪기 시작한 남편을 병원 응급실로 이송하기에 이르렀다. 환자에게 평상시 당뇨가 있어서 약을 먹고 있다는 말에 병원에서 혈당을 재보니 혈당치수가 최악의 수치까지 올라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가족들이 아픈 동안 죽을 끓여 먹었는데, 죽이 그야말로 혈당에 쥐약 아닌가. 그 때 코로나에 걸리니 이 것이 치명타였던 것이다.
아내가 일하던 병동, 코로나 병동에 홀로 중환자실에 입원되어 있는 남편과 그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심정이란. 가족 방문도 허락이 안되었다. 코로나 시국 초창기에는 코로나에 대해 알려진 것이 너무 없어서 병원에서 무자비하게 한 면이 있었다. 동료 간호사들과 의사선생님들의 리포트를 듣는 수밖에 없었다. 호전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남편을 보게 해주지 않고...
남편은 중환자실에 들어간지 3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병원장 president 에게까지 요청을 하고 애원을 하여 간호사였던 아내만 병실 바깥에서 볼 수 있도록 배려가 되었다. 그날 남편의 모습을 봤는데 그 처참함이란. 호전되고 있다던 의사와 간호사들의 말과 너무 상반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코로나 병동에서 몇일만에 죽는 사람들을 봐왔는데, 남편은 마치 아내와 가족을 너무 보고싶은 나머지 살려고 하는 의지 하나만으로 그렇게 오래 버틴거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두번째 면회를 하던 날 남편에게 말했다.
- 여보 괜찮아... 자유롭게 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평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아빠의 죽음이 커다란 멍이었다. 아빠를 보지 못하고. 아빠는 당연히 건강한 모습으로 병원에서 나올 줄 알았던 아이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것이었다.
아빠는 매일마다 아내에게 사랑문자를 보내고 아이들에게도 전화를 하는 자상한 아빠였다고 한다. 거의 2년이 지난 지금도 아빠에게 오는 문자가 없다는 것에 적응이 안되고 있단다.
아내는 남편의 목소리를 알람으로 맞춰놓았다. 생전에 항상 잠을 깨워주던 남편. 그 남편의 목소리가 아침마다 자기를 깨워준다.
- 여보 일어나~
아빠 없는 삶에 적응을 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거의 2 년이 지났는데도, 그 아빠의 빈자리가 아직도 매일 매일 모든 순간속에 느껴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