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브로콜리 너마저 칭찬하기
오늘 슬픈 소식을 들었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기타리스트 향기님이 탈퇴한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놀라서 10초 정도 가만히 멈췄다. 나로서는 예상해 본적 없는 일이었다. 마치 무한도전이 마지막을 고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걸 크러쉬 향기님이, 브로콜리 너마저 공연에서 티셔츠를 홍보하며 웃으시던 향기님이 이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니. 그러고는 브로콜리 너마저가 나와 함께 한 시간을 생각해보았다.
나는 2008년 고3이던 그때 그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에게 신문물을 접해준 사람은 오빠였다. 당시 난 내 음악 취향이라곤 전혀 없었던, 벅스 차트 100만 듣던 쪼무래기였는데 오빠가 내게 오더니 브로콜리 너마저 1집 앨범을 건네주었다. "야. 이거 들어봐." 귀여운 아기 얼굴이 담긴 앨범 표지의 그 앨범이었다. 나는 왠지 그 아이가 이어폰을 끼고 앨범 속 노래를 들으며 퐁퐁 위를 뛰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지금으로선 그때 그 시절의 문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 CD플레이어로 노래를 들었다. '앵콜요청금지'라는 노래가 좋았다. 더 이상 끝나버린 노래를 할 수 없다는 그 가사를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모두가 나에게 바라고 있고 나도 조금은 설레지만 그 노래를 더 이상 부를 수 없다는 그 마음이 알 것 같으면서도 오묘하게 느껴졌었다. 그 오묘함이 또 좋았다. 아! 그리고 이 앨범을 알게 되고 특히 좋았던 건 친구들이 모르는 나만 알고 있는 세계가 생긴 것 같다는 거였다. '너네 다 벅스 차트 100만 듣지? 난 브로콜리 너마저 듣는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그런 허세가 생겨버렸다. 1집은 정말 많이 들었다. 명반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2009년 드디어 나는 대학을 가게 된다. 2009년 새내기 시절은 참 다사다난했다. 술 먹고 대학교 앞을 기어 다니기 일쑤였고 동기였던 친구들과 그렇게 몰려다니며 놀았다. 당시 우리의 아침인사는 "어젯밤도 학교 앞 청소 네가 다 했냐?"였다. 그렇게 다들 학교 앞을 기어 다니며 제 옷으로 학교 청소를 해댔다. 일종의 애교심인거지. 그때는 그 시절이 4년 동안 쭉 이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그 시절은 딱 그 1년뿐이었다.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우리는 스펙 준비며 시험 준비며 서로 바빠졌고 학교 앞을 기는 날은 손에 꼽힐 정도가 되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고학년이 되자 나는 매일 밤새고 놀고 하는 게 더 이상 힘들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고작 스무세네 살이었는데 내가 꽤 늙은 줄 알고 '애들이나 저러는 거지'하며 피곤해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애기일 수가 없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래서 나는 '2009년의 우리들'이라는 노래가 내 노래처럼 느껴진다. 2009년 그 해맑고 신나기만 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그때 여러 가지 비밀스러웠던 감정들이 그 노래를 들으면 생각난다. 지금도 출근길에 자주 듣는데 다시 돌아올 수 없는그때 그 마음들이 그리워 아련하기만 하다.
그리고 2012년 나는 4학년이었고 취업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취업하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캄캄한 길을 홀로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난 가족도 없는 도시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학교 친구들도 다들 제 갈길을 찾아 휴학하고 취업 준비하며 바빠졌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독서실 가서 하루 종일 공부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상에 대한 확신도 옅어졌다. 누가 한대 툭 치면 울 것 같은 사람이었다. 하루는 고향 친구가 취업했다고 카톡이 왔었다. 당연히 기뻤고 친구가 잘되어서 좋았지만 눈물이 났다. 왠지 모를 박탈감에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혼자 질질 울었다. 친구가 잘 된 건데 우는 그 모습이 나 스스로 싫어져 더 울었다. 그런 날들이었다. 그때 브로콜리 너마저의 '잔인한 사월'은 내 뼈를 때리는 노래였다.
거짓말 같던 사월의 첫날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데
왠지 나만 여기 혼자 남아 가야 할 곳을 모르고 있네
나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의 지금은 깊어만 가는 잔인한 계절
이 노랜 당시 구구절절 내 뼈를 그렇게 때렸었다. 그때 난 아이폰4에 브로콜리 앨범 노래 파일을 아이튠즈로 넣어 듣고 다녔었다.
브로콜리 너마저가 3집을 낸 2019년 나는 이미 직장인 6년 차가 되어있었다. 지금은 7년 차가 된 거다. 아직 쪼무래기이긴하다. 이젠 친구 중 누군가는 결혼을 했고 또 누군가는 자기 집을 샀다. 친구들의 삶이 점점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는 나날이다. 우리는 너와 내가 다를 바 없이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변화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제 각자의 삶이 생겼고 그 삶의 모습은 확연히 다르진 않지만 조금씩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더 크고나면 우리가 더 많이 달라질 것같아서 그것도 두렵다.
어렸을 때 난 부모님이 집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모습이 별로였다. '빚을 먼저 갚아야지' 하시며 여행도 자주 못 가고 외식도 정말 기쁜 날만 하는 게 멋지지 않다고 생각했다. 작은 집에 살더라도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게 쿨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물론 여전히 작은 집에 살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이 좋다. 꼭 큰 집을 가지고 싶은 건 아니다. 근데 그 작은 집이 도시의 변두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집이 조금 작더라도 번화가와 가까웠으면 좋겠고 대형마트랑 가까웠으면 좋겠다. 주변에 걸어 다니면 예쁜 카페가 몇 군데 있었으면 좋겠다. 대형마트와 가깝고 주변에 예쁜 카페가 많은 동네의 작은 집은 내가 살 수 없는 가격이다. 사실 변두리의 작은 집도 빚을 내야 살 수 있다. 허리띠를 조를 수밖에 없는 거지. 매일 일하는 게 싫다. 가끔씩 취미로 일하면 좋겠다. 노는데 따박따박 월세가 나오는 건물주가 부럽다.
그렇게 자본주의에 젖어버린 나에게 브로콜리 3집 '속물들'은 바로 뼈를 때려버렸다. "그래 우리는 속물들"로 시작하는 그 노래도 취준생 때 그들의 노래가 나의 뼈를 강타했던 것처럼 역시 현재 나의 뼈를 툭툭 친다. 그렇게 뼈를 맞고는 이내 '브로콜리 너마저도 속물이라는데 나라고 별수 있겠어' 하며 웃으며 차 안 블루투스 장치로 노래를 들으며 출근한다.
그렇게 난 오랜 시간 브로콜리 너마저와 성장해왔다. 그래서 나에게 그들의 노래는 특별하다. 대학 시절 그들의 노래를 노래방에서 불렀고 취준생 시절 그들의 노래로 울었고 지금은 그들이 여전히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향기님의 탈퇴 소식은 나와 그 시절을 함께 공유한 것만 같은 사람이 그 자리에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속상했다. 난 아직 어려서 그런지 작은 이별에도 익숙해지지 못했다. 어떤 만남이건 함께 있었던 그 공간과 시간에, 함께 있었던 그 사람들이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은 받아들이기가 버겁다.
그래도 향기님의 섬세하면서 특별한 기타 소리를 또 어디에선가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들이 더 오랫동안 나의 일상과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 나를 떠난 건 해리포터와 무한도전으로도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