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eer Apr 17. 2020

요가 선생님이 가르쳐 준 것들

본격 요가 선생님 칭찬하기

  요기! 요가 선생님께서 요가를 하는 사람들을 요기(yogi)라고 한다고 하셨으니 몸은 통나무처럼 뻣뻣하지만 나는 어엿한 6년 차 요기이다. 요가를 배우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미묘하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몸의 유연성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생활이나 생각들이 조금씩은 달라졌다. 다 나에게 요가를 가르쳐주신 선생님 덕분이다.


  선생님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실 때면 나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다시 한번 동작을 가다듬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이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으시고 숏커트한 머리에 탄력 있는 몸을 가지셨다.  나이 차이가 그렇게 크진 않지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지신 분이시다. 우아한 카리스마랄까. 그냥 바라만 봐도 멋있지만 그녀의 수업을 들으면 더 존경하게 된다.


  내가 그녀의 수업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보자. 먼저 그녀의 수업은 나에게 몸이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요가를 배우기 전 나는 몸뚱이를 가지고는 있지만 신체 부위 하나하나에 대해 인지를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걸어야 하니까 팔과 다리를 움직였고 숨은 쉬지만 들숨과 날숨을 제멋대로 나 편한 대로 쉬었다.


  처음 요가 수련을 할 때는 몸에 대해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요가 수업 50분 동안 내적 언어로 하염없이 욕을 해댔었다. 오늘 운동을 하러 가기로 결정한 오전의 나를 원망하였으며 50번을 후딱 움직여버리지 않는 분침을 미워했다. 선생님이 어찌나 카운팅을 천천히 하시던지 '제발 파이브라고 외쳐주세요(우리가 동작을 하는 동안 원투 쓰리 포 파이브 이렇게 수를 세셨다)'라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시간이 3개월 정도 지나자 동작이 익숙해졌고 '수리야나마스카라' 세트가 조금은 할 만해졌다.

  그때부터 평소 몸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거북목을 하고 책상 앞에 앉아있던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고 라운드형으로 굽어있는 어깨를 펴는 동작을 틈나는 대로 했다. 그전에 나는 거북목으로 있어도 그것이 거북목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라운드형 어깨 때문에 어깨가 늘 뭉치는 것도 모르고 어깨가 좁아 보인다면서 좋아했다. 그런데 알게 된 것이다. 몸이 한참 잘못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선생님은 그전부터 요가가 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하고 계셨지만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몸에 요가가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바른 자세가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손목 하나, 발목 하나도 다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소중히 다 풀어줘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들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십몇 년 동안 많은 걸 공부한 척하고 살았지만 제일 가까운 내 몸에 대해 생각해 본 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긴 하지만 이제라도 내 몸에 대해 알고 싶어 져서 참 다행이다.


  두 번째로는 선생님은 못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셨다. 딱 그렇게 말씀해주신 건 아니었지만 내 귀엔 그렇게 들렸다. 선생님은 자신의 몸에 맞게 하는 요가가 중요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계속 말해왔지만 나는 정말 뻣뻣하고 몸치이다. 그래도 살면서 여러 운동에 도전은 해보았는데 항상 운동을 포기하는 이유가 내가 너무 못해서였다. 스쿼시를 배울 땐 스쿼시 선생님이 여러 번 가르쳐줘도 못하는 나를 너무 답답해했고, 그게 열 받아서 포기했었다. 배드민턴을 배울 때에도 내가 배드민턴 선생님의 서브를 한 번도 쳐내지 못하는 모습을 회원 모두 다 함께 바라보고 있는 게 부끄러워서 그만뒀다. 못하는 것도 못하는 건데 못하는 날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선이나 다른 회원들의 시선이 '허접한 완벽주의자'인 나에게는 참기 어려운 것들이었다.(내가 생각하는 '허접한 완벽주의자'란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 하지만 마음처럼 완벽하게 해내진 못하고 내가 못 해낸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공책에 예쁘게 정리하고 싶은데 한 줄을 망치면 다 찢어버리고 그 공책을 안 써버리는 사람 같은 거랄까.)


  그런데 선생님의 요가 수업은 달랐다. 선생님이 자기 수준에 맞게 하라고 먼저 말씀해주셨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몸의 움직임이 다를 수 있다고도 말해주셨다. 그래서 고난도 동작이 힘들면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출 수 있었다. 그 자세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몸이 다 다르게 생겼고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아! 동작을 수련하는 것이 엄청 힘들었던 것도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요인 중의 하나였다. 동작들을 유지하는 것도 죽을 만큼 힘든데 남이 잘하고 못하고를 신경 쓸 겨를이 어딨냐고. 그래서 시선이 남에게서 나에게 맞출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 배울 수 있었다. 그 수업에서만큼은 남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 쓰이지 않았고 내가, 내 몸이 더 중요했다. 얼마나 내가 변화했는지가 나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렇게 인식할 수 있게 된 건 선생님의 가르침이 선행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르치는 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선생님은 항상 여러분이 계셔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어느 날 하루는 "여러분이 저와 함께 수련해주셔서 그것이 제가 수업을 준비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여러분 덕분에 제가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집니다."라고 말씀하셨고 어느 날은 "여러분과 수업을 하면서 제가 더 배우게 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말만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처럼 수업을 준비하신다. 월요일에는 찌뿌둥한 몸을 풀 수 있는 동작을 준비하셨고 금요일에는 주말에 운동을 못하니까 조금은 타이트하게 동작을 준비하셨다. 새로운 요가 방법을 배우고 도입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새로운 방식의 역동적인 요가나 음악을 활용한 요가도 접해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통 요가의 중요함도 늘 강조하셨다. 그녀의 수업에 대한 열정 덕분에 오랫동안 수련을 했지만 지겹지 않았고 다음 수업이 더욱 기대되었다.


  그녀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가르쳤지만 나는 오히려 그 수업에서 정신적인 것들을 많이 배웠다. 수련이 끝날 때마다 해주시는 말씀들 덕분에 어떤 날은 힘든 하루를 위로받았고 어떤 날은 깨달음이 있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일이 무엇일까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말씀들은 전형적이지 않았고 선생님의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아마도 선생님이 하루하루 수업을 소중하게 생각해주신 덕분이었다.


  어쨌거나 그녀 덕분에 나는 요가를 포기하지 않고 '요기'로 재탄생하게 되었고 횡단보도에서도 가만히 서있지 않고 무슨 동작을 해볼까 고민하는 웃긴 애가 되었다. 요가를 배우기 전의 나와 배운 후 나는 그런 식으로 달라졌다. 또 난 그렇게 달라진 내가 더 마음에 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