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eeer Apr 21. 2020

오후 세시의 빛을 좋아하는 사람

본격 남자 친구 칭찬하기 네 번째

  정말 봄이다. 겨울 내내 집안의 곰처럼 지내던 나는 어느 날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봄이 성큼 다가오다니. 그것도 모르고 집 안에 틀어박혀 지냈다니. 다들 알던 사실을 나만 늦게 알아챈 것 같아 왠지 아쉬움이 컸다. 봄의 정취를 한껏 느끼고 싶은데. 

 

  나는 불과 몇 년 사이에 부쩍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렸을 때 나는 정말 자연의 아름다움이라곤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른들이 꽃 사진을 좋아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각양각색의 꽃이 만연한 산을 오르는 것도 정말 싫어했다. 심지어 티비 속 여자들이 꽃을 받으면 좋아하는 것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것들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지금의 난 자연에 아주 꽂혀있다. 특히 출퇴근길에 볼 수 있는 강변은 나의 마음속 베스트 장소이다. 출근길 아침에 뜨는 태양과 그 태양의 빛이 비치는 강물도 좋았고 강길을 따라 휘청대는 갈대도 좋았다. 아침마다 직장으로 가던 차를 돌려 강길을 따라 산책하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다. 퇴근길은 더 눈부셨다. 퇴근하는 마음이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인지 더욱 아름다웠다. 뉘엿뉘엿 지는 석양과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무가 좋아 운전 중에 신호가 멈출 때마다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아침 풍경은 아침대로 좋고, 저녁 풍경은 저녁대로 좋았다. 평일 낮 시간의 풍경은 제대로 누린 적이 손에 꼽기 때문에 더 애틋하다. 

  

  그 강변이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들도 참 좋다. 봄에 아주 잠시 누릴 수 있는 벚꽃 풍경도 눈이 부셨고 꽃이 진 다음 피어나는 새싹들도 색이 예쁘다. 그 연둣빛이 어쩜 그렇게 새초롬하면서 푸릇한지 그 색을 닮고 싶어 진다. 여름철 울창하게 짙어진 나뭇잎 색들도, 가을에 점점 물들어가는 잎들도 때때마다 아름답다. 왠지 아련해지는 겨울의 강변도 그 나름의 정취가 있다. 이렇게 느끼게 된 건 불과 3-4년 된 것 같다. 도대체 그 사이에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는 자연 매니아가 된 것일까. 


  엄마는 네가 그사이에 좀 늙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사람에게서 관심이 자연으로 넘어간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맞는 말인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는 내 얼굴, 내 기분에만 관심이 쏠렸고 조금 더 크고 나서는 친구들에게 나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을 때부터는 사람의 행위와 이유가 늘 궁금했다. 그렇게 사람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나의 시선이 어느 정도는 옮겨진 것 같다. 자연을 좋아하게 된 것에는 직장 생활도 한 몫했다. 일을 하다 보면 나를 지치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피로함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쉬는 시간 동안은 사람 생각을 덜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자연이 편했던 것도 같다.  


  근데 자연을 좋아하게 된 것에 결정적인 이유를 꼽자면 남자 친구 때문이다. 남자 친구는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사귀기 전에 나는 사진 찍는 것을 가르쳐달라며 남자 친구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접근했다. 아주 좋은 카메라를 사서 그에게 카메라 다루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고 그렇게 만나는 횟수를 차츰 늘려 나갔다. 지도 날 좋아했으니 쉬는 날마다 나와서 가르쳐줬겠지만, 어쨌건 간에 나의 절묘한 전략으로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은 남자 친구에게 어떤 풍경 찍는 것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었다. 남자 친구는 오후 세네시의 풍경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어리둥절했다. 열두 시나 세시나 풍경이 뭐가 다른 거지? 둘 다 쨍쨍한 시간 아닌가? 그래서 왜냐고 물었다. 남자 친구는 해가 정점에서 조금 내려왔을 때 자연을 비추는 그 모습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그 시간의 빛의 색이나 그 빛에 비친 나뭇잎을 보면 다르다고 했다. 그때부터였다. 나도 그 느낌을 알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풍경을 나도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한 시의 풍경과 세 시의 풍경이 다름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아직도 확실한 그 느낌은 잘 모르지만 가만히 보다 보니 이 풍경은 이 풍경대로, 저 풍경은 저 풍경대로 다 좋아져 버렸다.  

  그의 자연 사랑은 엉뚱한 지점이 있다. 하루는 내가 약속에 늦어 허겁지겁 뛰어나갔는데 그가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민들레가 있었다. 뭐했냐고 물어보니 아스팔트 사이에서 혼자 피어난 민들레가 귀엽고 기특해서 보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걔가 귀여웠다. 또 다른 날에는 산책하는데 이상하게 걷길래 뭐하냐고 물었다. 길바닥의 벽돌들 사이에 피어난 풀들이 죽을까 봐 조심하면서 걷는다고 했다. 그런 대화들이 몇 년간 이어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스팔트의 꽃들이 귀여워졌고 벽돌 사이의 풀에도 관심이 간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서로 닮아가는 중인가 보다. 함께 사진을 찍다 보면 서로 좋아하는 풍경이 어느새 비슷해진 것을 느낀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한 만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정한 사람이다. 그는 길에 주차하면서도 자신의 차가 누군가 옆에 놓아둔 청소 도구를 챙기는 것에 방해가 될까 봐 차를 다시 주차한다. 누군가는 무심할 수 있는 일에도 그는 충분히 마음을 쓴다. 또 밤중에 자기 차의 불빛으로 인해 지나가던 사람이 눈부실까 봐 사람이 지나갈 때면 불빛을 살짝 끄곤 한다. 그렇게 그는 사람에 대해서도 섬세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나는 나의 무던한 시선 덕분에 마음 편하게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의 섬세한 시선을 익히고 싶다. 작은 것에 주의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사람의 마음도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와 지금껏 놀면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비슷해졌으니, 조금 더 오래 놀다 보면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도 어느새 닮아있지 않을까. 문득 나의 오십 살 무렵 즈음을 상상해본다. 카톡 프로필 사진을 꽃 사진으로 해놓고서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따쓰하게 미소 지을 줄 아는 중년이라면 지금 나의 바람이 아주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려나.                    

이전 14화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라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