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5분거리 기차역으로 향했다. 동행은 타일랜드 출신 카렌 카레니, 콩고 파키스탄 한국인이다. 이번 학기 두 번째 외출, 오늘 우리는 자유다 끙—
오랜만이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 당연하게 생각해던 것이 고맙게 다가온 길. 사람들은 떠나고 변해가는데 예전 그대로 있어줘서 모퉁이에 계단 위에 추억마저 묻어났다. 달리는 기차 밖 풍경도 똑같다. 아주 조금밖에 달라지지 않았다.
40분이 지나 플린더스 스트릿 역에 도착했다. 세인트 킬다 로드. 곧장 바다로 갈 작정으로 트램(tram 전차)을 기다린다. 처음 어학연수 와서 돌아다니며 설레던 기분이 아주 오랜만에 찾아왔다. 함께 어딜 간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트램 스탑 아저씨가 열심히 안내하는 모습이 우연히 찍혔다. 여기 노동자들은 친절해서 좋다.
멀리 스카이라인을 선회하는 공사장 크레인이 보인다. 역시. 미래 지향형, 언제나 발전을 도모하는 부지런한 도시, 지금보다 미래가 중요한 도시. 끙— 냉철하고 독한 엄마 같다. 그래도 떠나면 금방 돌아오고 싶은 도시가 멜번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짬뽕미가 스카이라인과 거리 곳곳에 산재 아니 혼재한달까.
세인트 킬다 로드. 멜번에서 제일 그림같다고 트램 안에서 단정해 버린다. 왼편으로 알렉산드라 가든이 오른편으로 아트센터와 갤러리가 가로수와 나란히 선다. 가든에선 전에 못 봤던 하얀 흉상 두 개가 문득 스친다. 어떤 인물들일까. 내 도시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동상 흉상들이 널렸다. 낯선 도시에 가면 다가가서 기념하듯 만져보고 사진 찍고 하면서 가까이 있는 건 이렇게 소홀하고 만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란 이런 걸 거다. 곁에 있으니 언젠간 손에 넣으리라는. 끙— 그런 날이 올까.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그 둘은 헤라클레스와 아폴로의 복제 흉상이다. 멜번의 한 저명한 정치가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선물로 받아와서 멜번 시에 기부했다고 한다. 1928년부터 그 자리, 퀸 빅토리아 가든 입구에 세워져 있었는데 나는 오늘 거의 처음 본 거다 끙——
바다는 오늘 냄새로 그 다음 소리로 그 다음은 촉감으로 왔다. 그중 하나가 빠져도 바다가 될까. 세인트 킬다 비치 참 오랜만이다. 심심하면 오던 곳인데 바다 없이 산지가 몇 년인가. 한 여름에도 바다 구경 안 하고 거뜬히 살 수 있었다. 난 갈수록 대범해졌다. 비릿하고 출렁대고 깔깔해서 잊을 수 있었나? 끙——
잡힐 것 같은 구름
사막 같은 모래
진한 태양
슬레이트 블루 바다
바다는 언제나 같지만 언제나 그립다.
삼단으로 밀려오는 은은한 선율의 물결 속에 뛰어들고 싶지만 롱스커트 운동화 차림이라 참는다. 끙— 언제나처럼. 바다가 좋아 먼 길 행차했어도 금방 떠나야 하는 게 또 바다다. 망망대해 앞에 마음 내려놓고 명상이라도 하기에 우리는 아직 젊고 갈길이 머얼다.
떠나기 전 모래사장 위 경사진 갑판 위에서 각자가 기약했을 다음을 위해 포즈 한 컷.
어쩌다 마주친 그대.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알버트가 바닷가 출구에 길을 막고 서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전투에 기여하고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 전투에서 가스에 심하게 노출되고 여러 부상으로 시달리다 40이 못되어 하늘의 별이 되었다.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만난 그를 더욱 기억할 것 같다.
시티로 돌아가는 트램 안. 96번 루트가 무척 맘에 들었다. 숲에 길을 뚫은 듯 좁다란 선로 양 옆으로 울창한 수목이 창에 닿을 듯 가깝다. 2008년 인디아의 어느 정글 같은 도로를 온종일 질주하던 버스의 감성이다. 이런 게 나만 좋은가 타인들은 무감해 보인다.
버크 스트릿 트램 하차. 옛 중앙 우체국 건물 앞이다. 멜번 인구가 급증하던 즈음인 1867년에 지어진 네오 르네상스 건축이 꽤 쓸만하게 생겼다. 지금은 우체국 대신 패션 브랜드 H&M이 안방마님이다.
쇼핑 몰 거리는 언제나 사람들로 오가는 트램들로 활기가 있다. 예전에 애정했던 백화점 두 곳 마이어와 데이빗 존스 옆으로 ZARA가 상륙한 지도 꽤 됐다. H&M, 자라, 유니클로, 글로벌 패스트 패션숍들이 이민 인구처럼 상륙해 좋은 자리 한 자리씩 꿰차고 있다. 지역 브랜드, 컨트리 로드, 위처리, 수잔은 건재하시는지. 아 옛날이여. 끙— 돌아가고파.
이른 점심으로 우동 비슷한 중국식 누들로 요기를 하고 아니 배불리 먹고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으로 돌아왔다. 기차를 타기엔 이르고 근처 갤러리에 들르기엔 늦은 시간, 야라 강을 조금 거닐기로 했다.
슬레이트 블루와는 대조되는 프린세스 브리지 아래 카키색 야라 리버. 그게 바다와 강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하겠다. 끙— 색과 상관없이 우리는 멜번의 젖줄 야라를 사랑하리. 언제 생겼는지 강식당(강 위에 식당)이 어린이 풀장까지 비치해 두고 성업 중이었다.
오후 2시 5분 기차로 귀가할 거다. 시내 와서 보낸 세 시간이 알차고 새롭고 조금 지쳤다. 초가을 맑은 날 따가운 자외선이 주범이렷다. 물론 자외선 차단 같은 건 없었다. 그을음, 비타민 디편에 서는 게 자연스럽고 거추장스럽지 않으니까.
플랫폼에 걸린 역명판이 고풍스럽다. 나 자신이 고풍스러워진 이유이리라. 플린더스 역과 나, 나만이 느끼는 감회, 울 학생들은 모를 거다. 그들은 그들만의 감회를 안고 역을 떠날 테니까. 즐거웠는가? 오늘도 함께 해줘서 감사하고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