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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J Mar 30. 2024

수잔 홀 Susan Hall

호주인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 우리는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잡담을 하곤 한다. 우리의 일상이다. 음식 이야기 가족 이야기 학생 이야기 휴가 계획.. 내면 속 깊은 얘기를 들추지는 않는다. 애마부인 수잔만 빼고.


수잔은 자신의 어린 시절 속내를 거리낌 없이 얘기한다. 아버지가 투명인간 취급을 했고 단것을 매일 주셔서 이가 썩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자기주장 없이 사랑을 주는 분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가족을 떠났다 돌아왔다 해서 불안했던 어린 시절과 우울했던 십 대를 어제 일처럼 회상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슬픈 눈을 가졌다.


그녀 가족은 말을 사랑했더랬다. 여기서 말은 경주마 같은 럭셔리가 아니고 핀토 호스라고 한다. 어릴 때 언니가 말을 사달라고 졸랐고 아버지는 딸의 소원을 몰라라 할 정도로 돈을 아끼는 성격이 아니셨다고. 자매의 취미는 말타기가 됐고 말을 타다 골반뼈가 부러지고 무릎을 다치기도 했다. 그런 아픔은 별거 아니었는지 포기나 변심 없이 그녀의 말 사랑은 평생 이어졌다.


우리는 같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있었고 시간표에 따라 교실을 바꿔가며 수업을 하고 수업 자료나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몇 년을 지내온 동료이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주차할 때 도와주기도 했고 점심만으로 한 짐인 그녀의 출근 걸음에 굿모닝 하며 이런저런 잡담을 했다. 그런 그녀가 15년 이상 다니던 직장을 곧 그만둔다고 했다.


멜번은 비가 많이 오지 않아서 말에게 척박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지난여름은 몹시 메말랐다. 강수량이 많아 수목이 울창한 깁스랜드는 말에게 쾌적한 환경이라고 했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빅토리아에서 그럴 수 있는지 속으로 잠깐 헤아려봤다. 역시 말을 타는 언니가 깁스랜드에 살고 있어 거기에 집을 샀단다. 갑작스럽다고 서운한 마음을 내비치니 몇 년 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이라 했다.


수잔은 오늘도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해도 해도 풀리지 않는 뭔가가 있나 보다. 나는 놓칠세라 그녀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운다. 다른 동료들의 얘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내 얘기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는 그리 사려 깊은 성격의 소유자가 아님에도 그녀의 이야기가 내 일인 마냥 관심이 가는 이유이다. 우린 많이 다르지만 닮은 데가 있나 보다. 나도 그시절 어릴때 멜랑콜리해서 그랬나 봐.. 같은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한달까.


다 털어놓으면서도 그녀는 부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버지의 방황을 헤아린 걸까.) 부모님은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그전부터 그들을 사랑했고 지금은 많이 그립다고 했다. 사적인 영역을 거리낌 없이 말해주는 수잔이 고맙기도 하고 이제는 곧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어 슬프기도 하고 가슴속에 맺힌 것을 풀어내는 건가 싶어 안아주고 싶기도 했다.


오늘은 그녀의 눈을 다시 들여야보았다. 평생 친구가 되어줄 말과 함께 부모님이 정말 아름다운 눈을 주셨다고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건넸다. 때 이른 백발이 웨이브로 감싸는 그녀의 갸름한 얼굴이 모딜리아니가 그린 깊고 푸른 눈의 여인을 연상케 했다.


Woman with Blue Eyes by Amedeo Modigliani 1918 @Musée d'Art Moderne de Paris


디테일 없이 단순한 모딜리아니의 초상을 좋아한다. 특히 동공 없는 아몬드 모양의 눈이 인상적이다. 텅 빈 응시에 가득한 그녀의 감춰진 감정이란 무얼까. 모딜리아니도 모를 것 같은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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