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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on Jul 02. 2024

Simplicity, 엄마라면 불가능한

초등 고학년 큰애는 (대한민국 남자아이라면 누군들 아니겠느냐만) 축구선수 손흥민의 팬이다. 덕분에 '축알못'이었던 엄마마저 프리미어리그 일정이며 국대 합류 일정까지 줄줄이 꿰게 되었다.


손흥민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늘 소환되는 사람은 그의 아버지 손웅정 감독이다. 미디어에 알려진 에피소드 몇 개만 봐도, 호되게 시킨 아버지도 대단하시고 그걸 또 꾸역꾸역 따라간 아들도 대단하다. 이 정도 부자는 되어야 '월클'이 되나 보다 싶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아들에게 손흥민 팬북이며 만화책을 사 주다가, 얼결에 나도 손흥민의 에세이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과 손웅정의 인터뷰집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를 함께 읽었다. 두 책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이거다.


단순함, Simplicity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손흥민의 집을 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그의 집은 진짜 깔끔하다.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그게 다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한다. 손흥민 에세이집에 어릴 적 집에서 찍은 사진들도 몇 장 있는데, 얼핏 보아도 살림살이가 아주 단정해 보였다.  


자신에게 정말 가치가 있는 것,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다른 생활을 단순하게 유지하라는 것은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자주 건네는 조언이다. 손흥민도 이렇게 말한다.


축구를 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축구만 해야 한다. 런던에도 유혹은 얼마든지 있다. 프리미어리그 선수는 본인만 원하면 얼마든지 화려한 삶을 만끽할 수 있다. 젊고 돈 많고 평소 시간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길을 가기로 했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망각하지 않는다. (...) 재미없는 삶이다. 정말 따분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감수한다. (...) 나는 얼마든지 수도승으로 살아갈 수 있다.

- 손흥민, <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중에서


손웅정 감독도 미니멀리스트다. 계절마다 웃옷 두 벌로 나고, 신발은 한국과 런던 합쳐 네 켤레란다. 한 켤레가 생기면 기존 신발 중 한 켤레는 버린다고. 인터뷰집 제목도 '읽고' '쓰고' '버린다'인데, 이 세 행위 중 마지막 '버린다'에 특히 방점이 찍혀 있는 듯하다. 그가 인용한 노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적으면 얻은 것이요,
많으면 미혹된 것이다

- 노자


읽기만 해도 소유에서 자유롭고 싶고, 나 역시 삶을 최대한 단순하게 꾸리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솟구친다. 이들처럼 대단한 사람은 못 되더라도, 적어도 내 삶의 고삐만큼은 내가 틀어쥘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말이다.



엄마의 삶 = 카오스

하지만..


엄마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는 사실.

물론 아이를 여럿 키우고 일까지 하며 삶을 단순하게 유지하고 생산성을 높게 유지하는 위대한 분들도 많이 계시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네 보통 인간은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일단 '살림'과 '육아' 모두 종합 매니지먼트가 필요한 풀 패키지다. 잠시라도 손을 뗄 수가 없을뿐더러,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게 거의 없다. 청소, 장보기, 밥 하기, 빨래의 일상적인 사이클은 그렇다 쳐도, 좀 더 장기적으로 추가되는 일들(드라이클리닝 맡기기, 이불빨래, 공기청정기 필터 갈기, 에어컨 청소 등)은 엄마의 시간표에 비정기적인 과업을 마구 추가시킨다. 최대한 단순하게 하고 싶어 달걀을 매주 월요일에 사기로 했다고 치자. 하지만 달걀 20구짜리 한 판이 소진되는 시기는 생각보다 일정치 않다. 그 주의 식단(달걀말이나 돈가스라도 하면 금방 떨어짐)이나 남편의 스케줄(저녁 먹고 오는 날이 많으면 남음)에 따라 재고가 늘 들쑥날쑥하기 때문이다. 달걀뿐 아니라 우유나 기본 채소도 마찬가지다. 늘 냉장고 안에 뭐가 있는지, 세제는 충분한지, 고장 난 가전은 없는지 머릿속 한 부분은 살림에 할애해야 한다.


내가 살림을 못해서 그러는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살림이란 불규칙하고 정신이 없는 법이다. 헬퍼나 이모님을 고용해 살림을 최대한 맡긴 적도 있었지만, '매니지'하는 건 결국 언제나 나의 몫이었고, 오히려 할 일을 부탁드리고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해 들이는 노력이 별도로 들어가기에 복잡함이 줄어들진 않았다.


육아는 더하다. 아직 어린 둘째가 아프기라도 하면 계획했던 모든 것은 와장창 어긋나게 마련이고, 그 와중에 큰아이 숙제를 봐주려면 아이 학교 시간표까지 머릿속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아마 예정에 없던 감정 싸움하는 시간만도 상당하리라 생각한다. 이 모든 크고 작은 과업들 속에 엄마의 시간은 의도와 무관한 무수한 파편으로 부서져 버린다.


이미지: Unsplash.com

나의 경우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이 카오스 속에서 생산성을 유지하는 것이 항상 가장 큰 숙제였다. 내가 하는 일이 원래도 딱히 복잡하고 어려운 건 아니지만, 가끔 진짜 초단순한 기계적 작업을 할 때가 있는데 그게 차라리 반가울 정도였다. 작년에는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동시에 첫 책을 출간했고, 큰애 학교에서 반대표까지 맡았었다. 아이 학교에서 하는 행사에 봉사활동을 다녀오면 하루는 금세 끝나버렸고, 나는 둘째를 데리러 종종거리며 달려갔다. 생산성은커녕 나에게 주어진 '꼭 해야 하는 일'만 간신히 해서 넘기기에도 급급했다.


그래서 손흥민 부자의 책을 읽으며 나도 '단순하게 살자!'라는 결심을 굳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엄마들도 나처럼 단순함을 갈망하지만 결코 그걸 이뤄내지 못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정의하는' 단순함을 위하여

최근 엄청 재미난 책을 읽었는데 켄 일구나스라는 사람의 <봉고차 월든>이라는 책이었다. 수만 달러에 달하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급기야 봉고차에서 2년 반 동안이나 생활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다. 어찌 보면 그의 삶이야말로 단순함의 끝판왕이었다. 그는 집세도, 공공요금도, 외식비도 0으로 유지하며 체육관에서 몸을 씻고 밴 안에서 삼시 세끼를 해결했다. 당연히 친목도, 사회생활도 전혀 하지 않았다. 대학원생이었기에 다만 수업을 듣고 책을 읽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봉고차 월든>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었다. 오두막에서의 단순한 삶, 오롯이 자기 자신과 대화하며 자급자족하는 삶이 분명 봉고차 월든의 주인공과 닮아 있다. 하지만 나중에 주인공도 깨닫는 것처럼, 사실 소로는 우리 생각만큼 금욕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마을이 가까워 친구들을 늘 만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빨래를 한 번도 스스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가 해줬다고!!) <봉고차 월든>의 작가도 자기가 추구한 것이 소로의 삶이 아니었을뿐더러, 소로의 삶조차 소로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도 예전에 여행을 하며 월든 호수를 가 보았는데 고요한 호숫가보다는 대천 해수욕장 같은 느낌이라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소로' 또는 '미니멀리스트'가 되려고 할 때, 또는 엄격한 이념에 따라 살아갈 때, 타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과 혼동한다는 사실이 이제 쉽게 눈에 들어왔다. 따라서 나 자신의 필요 및 욕구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작정 이념을 따를 것이 아니라 이념을 시험해보아야 했다. (...) 하지만 '무엇 무엇하면 좋겠다'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 만큼의 현명함은 갖추고 있었다.

- 켄 일구나스, <봉고차 월든> 중


결국 훌륭한 성과를 낸 손 부자를 존경하는 것과, 그들이 실천한 '단순함'을 내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은 별개라는 소리다. 나는 나만의 실험을 할 필요가 있다. 늘 너저분한 집에서, 늘 내 손길을 아들들 틈바구니에서, 늘 아침마다 밀어닥치는 자잘한 업무 이메일들 사이에서 나는 나만의 단순성을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 그리고 그 시작은 아마도 아이를 데려오기 전 서둘러 남은 업무를 끝내는 것이리라.


엄마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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