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매카시, <더 로드>
오늘 여기 43도야.
저는 일주일에 한 번, 인도에 있는 팀과 회의를 합니다. 몇 주 전, 인도와 파키스탄의 더위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수준이라기에 걱정이 되어 물어보니, 팀원 한 명이 체념한 듯 대답하더군요. 원래 더운 나라지만 43도라니, 정말 끔찍하게 덥겠지요. 건강에 큰 탈이 없기를 기원하며 회의를 마쳤습니다.
한국은 아직 많이 덥지 않아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사실 그조차 기후변화 때문입니다만) 기후 위기는 이렇게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처하는 발걸음은 더디기만 한 실정이에요.
얼마 전, ‘기둥이 무너지는 세상이 온다‘라는 글을 썼었는데요, 그 후 미국 환경청은 한 술 더 떠서 에너지 효율 부문의 대표 인증 제도인 ’에너지 스타’ 제도를 아예 철폐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실제로 이행을 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에너지 스타 데이터베이스에 크게 의존하여 일을 해 온 저로서는 참 암담하기 그지없습니다. 기후에 대응하려면 에너지를 들여다봐야 하고, 에너지를 아끼고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면 에너지 스타처럼 신뢰도 있는 인증 제도가 필수적인데 말이죠. 수십 년간 운용해 온 성공적인 제도를 그냥 없애버린다니, 기둥이 무너지다 못해 뽑히는 세상이 오려나 봅니다.
아무튼 그래서 요즘 참 우울했습니다.
게다가 앞으로도 줄줄이 예정된 바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재생 에너지와 탄소 포집, 전기차 충전소 등에 쓰일 펀딩을 수백억 달러씩 감축할 것이라고 합니다. 기후 위기에 대처할 돈도 없고 기준도 없으니, 과연 어떤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지 두렵기만 합니다.
<더 로드> - 우리의 앞에 펼쳐진 길은 어떤 모습일까
개인적으로 아포칼립스적인 상상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환경 재앙을 다룬 영화나 소설이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특히 어떤 경우는 읽어 내려가며 눈조차 크게 못 뜨고 한 장, 한 장 넘기기 두려운 이야기도 있는데요.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야말로 그런 이야기에 속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연의 외로움과 고통을 날 것 그대로 후벼 파는 듯한 소설이지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솔직히 별로 보고 싶지는 않더군요ㅜㅠ 현실과는 다른 세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도 절망적인 외로움과 존재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 오기 때문일 거예요.
이 이야기가 더 으스스한 이유는 애초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환경 재앙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합니다. 일단 인류의 대부분이 죽어 사라졌으며 동식물도 자취를 감춘 상황인데, 몹시 춥다는 얘기가 계속 나옵니다. 햇볕도 거의 보이지 않고요. 방사능 이야기가 없으니 핵전쟁은 아닌 것 같고, 대규모 운석 충돌이나 화산 폭발의 가능성도 있지만 대체 얼마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였길래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요.
보이지 않는 달의 어둠. 이제 밤은 약간 덜 검을 뿐이다.
낮이면 추방당한 태양은 등불을 들고 슬퍼하는 어머니처럼 지구 주위를 돈다. (p. 40)
확실한 것은 인류 전체를 위협한 무언가에 대해 공동 대응은 실패하였으며,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은 개인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오래된 통조림밖에 없고, 까딱 잘못하면 남에게 잡아 먹히는 비극적 결말로 이어질 수 있으니 한시라도 안심할 수 없지요.
이 소설에서는 너무 더운 게 아니라 너무 춥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후 재앙이 닥치면 일상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는 점에서는 꽤나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로드>에서는 추위 때문에 자꾸만 남쪽으로 내려가지만, 기후로 촉발된 버전의 <더 로드>는 북쪽을 향해 있겠지요. 소설에서 식품을 생산하고 판매, 소비하는 시스템, 빛이나 운동 에너지를 얻는 시스템, 사람을 신뢰하고 공동체를 구축하는 시스템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식물이 모두 죽었으니 식품을 생산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며, 기존에 만들어 두었던 통조림만이 유일한 가용 자원입니다. 열과 빛을 내기 위해 원시인처럼 모닥불을 피워야 하고, 따라서 기름과 땔감을 늘 상비하기 위해 애써야 하죠. 스위치만 누르면 손쉽게 에너지를 손에 넣는 현재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동 또한 도보가 전부입니다. 게다가 중간에 잠재적 약탈자라도 만나면 모든 것을 빼앗기기에 치안의 의무도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소설에서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소년’을 보며 가장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무 죄 없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만 믿고 공포에 떨며 길을 걸어가는 소년. 이런 세상에서는 출산도 육아도 아이에게 짓는 죄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미국의 미래학자이자 작가인 Alex Steffen은 '미래가 과거의 연장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우리가 아는 현재의 경제, 사회, 인프라는 미래의 환경 변화를 겪어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울하기는 하지만 가끔은 <더 로드> 같은 책을 읽으며 우리가 전혀 모르는 세상을 상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