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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Apr 03. 2021

찬란한 퇴사가 꿈입니다.

잠재적 연봉을 위한 큰 그림.


“그렇게 됐어요.”

“웃지 마 이 녀석아.”


열여덟에 들어와 실습생으로 2년, 산업기능요원으로 3년, 연구보조원으로 3년을 재직하던 A가 퇴사 면담을 신청했다. 매년 고등학생들을 받지만 유독 ‘되겠다’ 싶은 녀석이 눈에 보인다고 하는 8년 차 인사 쟁이의 허세로, A는 어느 방면에 내놔도 앞다퉈 데려가고 싶을 소위 ‘준비된 인재’ 임이 확실했다. 부쩍 자란 키만큼 꽤나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스물여섯의 녀석은 깔끔한 업무능력과 섬세한 센스를 장인의 수트처럼 장착하고 떠날 채비를 마쳤다.

본인이 갈 길을 정확히 아는 그는 온갖 유혹에도 현혹되지 않았고, 번복하지 않았다. 연봉 인상이라는 당근을 한 트럭 진상해도 흔들림 없이 단호박을 내놓는 녀석에게 건방지다 했지만 솔직한 감정은 아마, 부러움이다.



어쨌든 하는 사람들.


대학교 동기들 중 꽤 많은 친구들이 자퇴를 했다. 당장 결정하기는 싫지만 어떤 길로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두리뭉실한 생김새의 경영학과에 소속되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불안해하면서, 꿈을 찾아 떠난다는 저 어린 자들이 저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시작도 전에 선로를 이탈하는 끈기 없는 마라토너 보듯 했다. 자퇴한 동기들 몇몇은 가끔 테레비전에 나오는 유명인, 잘 나가는 쇼핑몰 모델, 철물점의 사장님이 되기도, 유명한 헤어 디자이너로의 삶을 살기도 한다.

그들은 탈선하는 청소년이 아니었다. 가는 방향이 잘못됨을 느끼면 과감하게 온 길을 되돌아 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자들이었다. 자퇴하던 당시에는 사실 10년 후 본인들의 모습에 대단한 확신이란 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했고, 이뤘다. 잘된 자기 객관화에 차곡히 쌓아 올린 그들만의 스펙은 볼보의 몸체에 페라리의 모터를 단 듯 거침없이 달려도 안정적으로 부딪힐 수 있게 했다.


내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똑바로 직시하는  호러영화의 오프닝 같다. 용기 있게 마주 보려 하지만, 저음의 브금이 영화의 시작을 알리자마자 실눈을 뜨고  귀를 막는다.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어쩌다    용기를 내고 눈을 크게 뜨면 갑자기 튀어나오는 무서운 것들에  소리 지르고 다시 눈을 질끈 감는다. 참고 어쨌든 끝까지 본다면 그다음부터는  쉬어질텐데, 그게  어렵다.


현실은 엑셀마스터


어쨌든 해봐. 잘 아는데 왜 너는 안 해? 라며 현재는 가끔 나에게 달콤하게 일탈을 속삭이지만 에어팟으로 귓구멍을 틀어막고 못 들은 척하며 똑같은 내일을 보내고 있다. 평범함이 싫다면서 금 밟으면 죽는 게임을 하듯 절대 평범함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소기업의 한계? 잠재적인 연봉.


‘대기업은 말이야,’ ‘대기업에서는’ 이란 서두 없이는 말을 못 하는 어른들이 있다. 바로 우리 회사에. 중소기업에 장기근속하시며 가계를 운영하고 계신 과장, 부장님들이다. 그들은 퇴사하는 될성부른 떡잎들을 잡지 못하는 것은 중소기업의 한계라고, 가재인지 새우인지는 소라껍데기 안에 살다가 몸체가 커지면 그 껍데기를 버리고 더 큰 껍데기를 찾아 떠난다고 멋진 시니어처럼 이야기한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들께서는 더 이상 몸이 크지 않아 여기 오래 머무시는 것인지요, 아님 작은 집이 몸을 조여 오는 고통을 즐기시는 타입이 신 건가요 묻고 싶은 입을 꾹 닫고 엄지를 치켜든다. 크으, 역시 연륜이 대단하시군요 라는 멘트와 함께.


어쩌면 맞는 말이다. 중소기업은 귀여운 뱁새다. 뱁새가 올려줄 수 있는 연봉 레인지가 대기업의 연봉 보폭을 쫒아가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것은 극소수의 중소기업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이다. A의 퇴사는 당장 떡 한 덩어리보다 이후에 방앗간을 짓겠다는 포부였을지도 모른다. 잠재적인 연봉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A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점검하며 큰 그림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비로소 퇴사를 했다. 반면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도구가 무엇인지도 모른 체 큰 그림을 그리겠노라며 어쨌든 퇴사하는 친구들도 있다. 근속연수가 증명해 주는 신입들. 단순히 일이 하기 싫어 포기하는 의지박약의 케이스들은 한 번 뛰쳐나가기 시작하면 가을철 메뚜기 뛰듯 사정없이 옮겨 다닌다. 세월은 언제든지 뛰어다니도록 기다려 주지 않는다. 탓만 하는 불만쟁이들은 결국 본인 능력 과대평가가 가져온 마음의 지옥과 통장의 사막화가 후회의 폭풍을 몰고 올 때쯤 울며 겨자 먹기로 정착한다.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건 확실하지만, 중소기업의 한계를 운운하며 노력 없이 탓만 하는 자에게는 놀랍게도 한계가 없다. 그들에게는 뱁새의 둥지도 펜트하우스일 테니까.



찬란한 퇴사를 꿈꾼다.


“쟤는 무슨 자신감으로 퇴사를 한대? 어디 갈 곳은 있나?”


남 걱정으로 은혜가 넘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랬고, 아마 지금도 은연중에 10%만 보고 판단하는 ‘빙산 일각의 오류’를 범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자신감에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근거는 그들의 마지막 장을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위에서는 근속연수 짧게 이직을 여기저기 하는 친구들에 불만쟁이라 표현했지만, 사실 숙성 중인 건지 썩고 있는 건지 모를 나를 돌아보면 아니구나 싶을 때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는 저런 종류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너의 꿈이 뭐니. 하고 물으면

세상을 구할 영웅을 이야기하던 초등학생.

거창한 것을 말하려 했던 중학생.

유니크해 보이고 싶었던 고등학생.

안정적인 돈벌이가 꿈이었던 대학생.


그 학생이 자라서 퇴사가 꿈인 직장인이 되었다. 쓰면서도 웃픈 마음에 실소를 터뜨리지만, 어쨌든 비로소 나의 꿈을 찾았다. 물론 당장에라도 할 수 있는 책임감 없는 퇴사는 아니고, 진정 내가 원하는 걸 찾아서 떠날 수 있게 될 어느 날의 퇴사. 원하는 것이 지금 생각하는 그것이 맞는지를 귀찮도록 묻고, 그것을 함으로 인해 내가 잃게 될 것들과 짊어지고 가야 할 고난들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인가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을 능력을 버겁도록 쌓고 나서의 퇴사를.


어쨌든이 아닌, 비로소 인 그런 찬란한 퇴사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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