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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Jan 09. 2021

1월은 인사발령의 달.

52시간이 모자라.

고과는 바닥인데 근속년수가 찼다고, 저 친구 나이에 신규 입사자와 ''이 같으면 되겠냐며 규정 어디에도 없는 승진을 획득하는 직원과 그를 바라보는 안 좋은 눈빛을 조명 삼고, 구설수를 BGM 삼아 인사발령을 진행한다. 1월은 인사발령의 달이자 연봉협상의 달. 나같은 하바리 인사담당자는 주관적인 판단 따위 현관에 묶어두고 출근해야 하는 달. 정월에 뜨는 저 달이 새희망을 주는 달이라는 건 이태백 시대의 전설. 사실 군대에 다니는 게 아닌가 싶게 상명하복으로는 5성 장군님들이 따로 없다.


혹시 너도?

달갑지 않은 메일이 도착했다. 인사발령과 조직개편 확정본. 마우스가 무겁다. 심호흡이 필요하다. 괜히 화장실 가서 거울 한 번 보고 누군가는 공감할지 모를 그런 위안을 스스로에게 주며 천천히 메일을 확인한다. 빠르게 이름을 스캔한다. 휴. 다행이다. 이번 리스트에는 없다. 내 동료 혹은 내 후임의 이름이 승진자 리스트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쉰다. 작년에 나는 나름 열심히 일했는데 저 자가 나보다 평가가 좋았을 까 봐, 회사 컴퓨터에 앉아 일하는 시간만큼 마음 편한 것도 없는 사람인데 그걸 나만 알까 봐. 어째서 스스로에게 주는 점수는 늘 후하지 못한 지, 셀프 불신과 과소평가가 압축팩의 이불처럼 자존감을 잔혹하게 눌러놔서 혹시 저 자가 나보다 잘될까 봐 불안하다. 뒤쳐질까 봐 불안해서 전속력을 내지 못하고 수시로 뒤돌아 보는 러너 같다. 넘어져도 괜찮지만 사실 안 넘어졌으면 좋겠다.

'못났다' 하지 말고 '실로 인간적인 감정'이라 정의하자. 인사발령의 시즌에 느끼는 근로자들의 오만가지 감정. 그래서 말인데, 혹시..?


52시간이 모자라

"짜장면에 짬뽕은 곱빼기, 탕수육은 대자로 주시고 양장피에 소스는 넉넉히 주세요. 크림새우는 바삭하게 부탁드려요. 아, 배가 고프니 10분 안에 와주셨으면 해요. 기사님 안전 운전하시고요. 가능하겠죠?"


하이킥이 필요할 때

2021년 1월은 승진과 발령의 달이기도 하지만 약 1년 6개월 동안 유예되어 왔던 노동시간 상한제 도입 대상기업의 주 52시간 계도기간의 종료를 알리는 달이기도 하다. 해가 쥐에서 소로 바뀌었다고 업종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업무량이 절로 주는 것도 아니니 회사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할 것이며, 근로자들은 그'대책' 이라고 내놓는 것들이 얼마나 실효가 있을 것인가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불편한 얼굴을 보여줄 수 있어야 쌍방적인 소통이 가능한 이상적인 직장일 것이다. 아쉽게도 이상은 현실과 멀다. 일은 종전 그대로 시키면서 퇴근은 일찍 하라는 모순적인 지시에도, 퇴근 카드를 찍고 추가로 일하라는 편법적인 지시에도 사실 근로자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퇴사가 최선인 안타까운 현실이다.

 

"52시간은 마음의 시간일 뿐."


"김대리, 오늘도 야근하면 52시간 초과야. 얼른 퇴근해야지?" 라면서 퇴근시간 임박해서 업무 오더를 내리는 그대는 아수라 백작인가요, 물고기 기억력 열매를 먹은 악마의 열매 능력자인가요. 그저 순수한 빌런인가요. 제발 집에 가라고 해도 못 가는 직장인들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체계가 잘 잡힌 기업들, 혹은 이미 제대로 시행하고 있는 기업들은 주 52시간이라는 근로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아니, 부족하지 않았었을까. 이천년도 초반까지 토요일에도 등교를 하던 학생들이 격주 토요일마다 '놀토'를 부여받았던 때를 쥐어짜듯 기억해 보면, 당사자들은 야호 했고 어른들은 그래가지고 공부가 되겠나 하며 우려가 99%인 걱정 비슷한 걸 했었나. 결과적으로 주 5일이 된 마당에 옛날을 돌이켜 보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변화에는 소음이 있기 마련이다. 어차피 변화해야 할 때라면 아기 걸음마하듯 하던, 격동적으로 하던 속도보다는 방향에 중점을 두고 나이스 하게 했으면 한다. 정부에서는 당장 어쩌지 못하는 중소, 중견 기업들에 수 가지 정책들을 제안한다. 부족해진 시간만큼 인원을 추가 고용하라며 지원금을 주기도 하고, 유연하게 근로시간을 운영하면 옳지 잘한다 하고 장려금을 주기도 한다. 우리 회사는 빅이슈를 인재 채용으로 삼고 인원 충원에 힘쓰려 하지만, 모시고 싶은 인재들은 중소기업을 거르는 추세인지 면접조차 쉽지 않다. 유연한 근로시간 운영은 사실상 큰 효과가 없다. 그렇다면 보너스 유급휴가를 마구 부여해 주 52시간이 초과되지 않게 해 보자 제안했다. 그 날 나는 눈총으로 얼굴이 뚫릴 수도 있겠다 싶은 경험을 했다.


알고 보니 법 위에 지어진 회사

"원래 우리 회사는 연차를 안 써"

"분위기상 월금은 암묵적 연차 반려야"


사고방식에 사고가 났나. 근로기준법이 정하고 근속의 대가로 부여된 나의 연차를 왜 그대가 생색내는가. 막상 옆에 있어도 없는 듯하면서 자리만 비우면 빨리 들어오라고 핸드폰에 전세 내는 우리 아빠처럼, 당장 급할 것도 없으면서 연차에 눈치를 주는 결재자들은 무슨 심리일까. 윗세대에 받았던 설움을 대물림해주고 싶어 하는 온고지신의 탈을 씌운 구태의연일까. 연차수당이라는 달콤한 이야기를 하며 연중에 열심히 일하면 연말이 더 따뜻해질 거라는 당근인 척하는 채찍을 맞아 가며 주 52시간은커녕 주어진 연차도 쓰지 못하고 받은 수당으로 소주 두 병 세 병 사 마시며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색에 잠기고 싶지도, 눈물을 훔치고 싶지도 않다.


안다. 회사의 입장과 근로자의 입장을 적정하게 조율하여 집행하는 일이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급여 생활자인 근로자도 느끼는 것을 사용자는 얼마나 크게 고민하고 있을지 가소롭게나마 어느 정도 짐작은 된다. 하지만 그에게 솔루션을 제공하는 실질적 정책집행자들은 본인들도 같은 근로자라는걸 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애사심이라는 이쁜 물감이라도 변질된 캔버스에 칠해진다면 똥칠과 다를 것 없다. 솔로몬의 지혜를 바라지는 않지만, 비비기에만 급급하지 않은 차기 리더의 등장 정도는 새해 소망으로 소소하지만 간절하게 바래보는 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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