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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May 03. 2023

정말 오랜만에 커피를 내렸다

부여잡고 싶은 평화의 순간

정말 오랜만에 커피를 내렸다.

좀 뜬금없지만 '핸드드립 커피'는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 엄마 아빠는 아침에 늘 커피를 내렸다. 커피 그라인더 ‘위이이잉' 소리에 난 잠을 깨곤 했다. 간결하고 둥근, 아빠 손에 꼭 잡히는 '필립스' 그라인더는 초딩도 안 된 내 눈에도 왠지 멋져 보였다. 방에서 나오면 아빠가 주전자를 빙빙 돌리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그렇게 그들은 하루에 평균 7-8잔을 내려 마셨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고 커피에 재미를 붙였을 때 즈음 엄마가 말했다.

"참 다행이야, 네가 커피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펴서"

'응?' 대답 안 했다.

난 그렇게 은밀하게 그들을 좇아 쓴 맛을 기막히게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네스프레소 기계를 들인 이후로 커피를 내리는 일엔 흥미가 없어졌었다. 커피맛에 엄청나게 예민한 혀도 아닌 데다가 원래도 그 묵직함과 쓰디씀을 좋아했던 거라 골라 먹는 캡슐 맛은 대체로 만족스러웠고 여유 없는 아침에 '출근길 한 모금'을 가능케 하는 오히려 고마운 존재였다.


얼마 전 홀빈 커피를 선물 받았다. 어제 모처럼 여유가 생겨 꽁꽁 숨겨놨던 그라인더를 꺼냈다. 드륵드륵 갈아서 종이 필터에 얹었다. 첫 물을 내렸다. 이상하게 마음이 평화로웠다. 기다렸다 또 한 번 물을 내렸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온전한 평화였다.


장비를 박스 안에 다시 넣지 않았다. 대신 눈에 보이는 곳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했다. 오늘 아침, 또 커피를 내렸다. 대체로 평화롭지 않은 아침에 짧고 굵은 평화의 시간이었다.


돌아보니 우리 부모에게도 참으로 치열했을 그 시절, 그들도 이 평화의 순간을 누리기 위해 그토록 커피를 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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