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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필름 Oct 03. 2022

다른 대답을 할게

MBTI 'N'의 망상은 위대하다



항상 생각하는 시절이 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흔한 시간 이동 드라마처럼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대답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스물한 살이다. 그 애도 스물한 살이다. 나는 수업을 마치고 동아리 방에 앉아 있다. 동아리 사람들이 시시콜콜하게 쓰는 방명록을 읽고 있다. 방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심드렁하게 시간을 때운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그 애가 들어온다. 나를 보더니 반가워한다. 나는 아무 의미 없이 인사하고 방명록을 마저 읽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 애가 나에게 묻는다.


- 밥 먹었냐?

- 아니.

- 밥 먹으러 갈래?

- 별로 배 안 고파.


그 애는 조금 서운해하더니 재차 묻는다.


- 같이 산책하러 갈래?


나는 몰랐다. 스물한 살의 남자 애가 형들도 있는 동아리 방 안에서 동갑의 여자 애에게 같이 산책을 하러 가자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서른다섯 살의 나는 다르게 답한다.


- 응. 좋아.


그 애와 나는 함께 밖으로 나간다. 그 애가 새로 알게 됐다는 저쪽에 있는 길로 간다. 그곳은 평온하고 아름답다. 나는 그 애와 나란히 걸으며 말한다.


- 여기 정말 좋다. 같이 산책 가자고 해줘서 고마워.


길을 걷다 이제는 배가 고프다고 말하며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신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지나가다 나를 발견해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는 그 애의 눈만 똑바로 바라보며 떠든다. 그 애가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용기가 생길 때까지, 그렇게 밤이 깊을 때까지 그 애를 보며 웃고 또 웃는다.


그러나 그 순간은 절대 돌아갈 수 없다. 그 애는 죽고 없고 나만 여기에 있다. 나는 이제 그만해야 하는데도 오늘도 그 시절을 생각한다. 그 애는 사고로 죽었고 나는 그 사고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나의 나르시시즘이 그 사고를 마치 내가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사고하게 한다.


시간은 어떻게든 가지만, 어떤 시간은 가지 않는다.




캐나다는 수돗물을 마시는데 나는 생수를 마셔서 물을 사러 저녁에 편의점으로 걸어가는 길이었다. J에게서 뭐하냐고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J는 고등학교 친구다. 4년 전 내가 프랑스에서 한 달 살기를 할 때 내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다며 갑자기 연락했었다. 오랜만에 애틋한 대화를 나눴고 J는 그간 만났던 고등학교 친구들 이야기를 하다 내 첫사랑의 소식도 전했었다. 나는 괜히 두근거려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 마음을 글로 써 책에 담았다. 그리고 4년 후 캐나다, 이번에도 J에게서 연락이 왔다.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J는 내일모레 결혼한다고 했다. 갑자기 연락해서 너무 미안하고, 이런 일로 연락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결혼 소식을 알게 된 고등학교 친구들이 하나 둘 자기도 온다고 해서, 그런데 그중에 너의 첫사랑도 있어서, 오겠다는 애들을 보니 여기에 꼭 너도 부르고 싶어서, 그래서 이렇게 연락하게 됐다고 J는 나에게 사과했다. 나는 나를 떠올려줬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내가 누군가의 결혼식에 초대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애초에 연락하지 않으려 했던 마음도, 그리고 이제 와 연락하게 된 마음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고 정말 고마웠다. 그러나 나는 갈 수 없었다. 나는 하필 캐나다에 있었다.


만약 내가 간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생각한다. 퇴사 후 급격하게 살이 빠져 홀쭉해진 나를 생각한다. 그러다 갑자기 J의 연락을 받고 다음 날 백화점에 가서 100만 원짜리 드레스와 구두와 가방을 사는 나를 생각한다. 나는 피부 관리를 받고 전문 샵에 가서 머리 손질과 메이크업을 받는다. 나는 10만 원을 주고 결혼식장까지 택시를 타고 간다. 미리 준비해 온 우아한 축의금 봉투를 꺼내 전달하고 어릴 적 한 번 보았던 J의 언니와 악수하고 그 옆에 서계신 J의 어머니에게 인사한다. J의 언니는 나에게 몰라보겠다며 놀라고 J의 엄마는 네가 우리 애 친구구나, 아이고 너무 예쁘다, 하며 안아주신다. 나는 정말 축하드린다고 말하며 신부대기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J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나의 첫사랑을 만난다. 그 애는 나를 보고 잠깐 멍해지고 쟤가 누구더라, 하는데 옆에서 J가 나의 이름을 외친다. 그제야 그 애는 나를 알아본다. J는 일부러 그 애와 나의 자리를 함께 붙여놓는다. 그 애와 나는 어색하게 앉아 함께 밥을 먹고 결혼을 축하한다. 그 애는 나를 못 알아봤다고 말하고 나는 그 애를 바로 알아봤다고 말한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는 잠시 쭈뼛거리고 그 애는 나에게 혹시 차를 끌고 왔냐고 묻는다. 내가 대중교통을 타고 왔다고 하자 그 애는 나에게 그럼 자기가 차를 태워주겠다고 한다. 나는 역이 근처라 괜찮다고 하고 그 애는 착해서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야기도 할 겸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그 애는 내비게이션에 내 집의 주소를 입력하고 나는 향수를 너무 많이 뿌렸나 싶어 순간 아찔해진다. 그 애는 아까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라고 하며 어떻게 지내냐고 이제야 묻는다. 나는 다짜고짜 나 때문에 많이 불편했지, 라며 수줍어한다. 그 애는 아니라고 하고 나는 대답과 상관없이 내가 너 좋아했으니까... 라고 말을 이어간다. 그 애는 옛날 일인데 뭐... 라고 하고 이제는 내가 아니라고 한다.


- 아니. 옛날 일 아닌데. 이제 불편하겠다.


나는 어쩐지 옛날의 내가 아니고 그 애는 여전히 옛날의 그 애다.



그러나 나는 하필 캐나다에 있다. 퇴사 후 급격하게 살이 쪘다. 오히려 지금 한국에 있지 않다는 게 다행일 정도다. 나는 결혼식에 갈 수 없다. 이런 모습으로 그곳에 가서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앉아있을 수 없다.


만약 지금 비행기 표를 바꾸고 숙소의 남은 기간을 취소하고 급히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뚱뚱한 모습으로 그 애 옆에 앉아 그 애의 눈을 쳐다보면 뭐가 어떻게 될까.



나는 무언가를 하지 않음으로 종종 나를 지킨다. 하지 않는 인생은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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