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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필름 Sep 24. 2022

언니, 나 이 바닥을 떠나야겠어


여행에 관한 책을 쓴 지 2년이 지났다. 그동안 회사를 열심히 다녔다. 엄청 괴로웠지만 그걸 모른 척할 만큼 즐거웠다. 나는 언제나 일을 즐거워하고 일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곧 나를 의미하는 인생을 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일하는 곳마다 대표의 인성이 형편없었다. 한국 어딘가에 제발 단 한 곳이라도 좋은 대표가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뭐가 부족해서 한 번을 만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속상하다.


1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이번에도 역시 대표의 인성 문제로 그만뒀다. 자꾸 이러면 도대체 일은 언제 하냐며 혼자 몰래 울부짖었다. 어딜 가나 사람이 나쁘면, 도대체 일은 언제 하나.


4년 만에 해외여행을 한다. 출국 수속은 생각보다 너무 단순하고 깔끔했고 공항엔 사람이 없어 한가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장편 영화 현장에서 같은 스텝으로 만났던 W가 있다. 그때의 기억은 꽤나 아찔했고 아직도 나에게 깊은 상처지만, 친구를 하나 얻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감사한 일이다. 나는 영화 연출부, W는 제작부였다. 이후 나는 피디, 작가 등 여러 분야를 돌아다니며 살았고, W는 꾸준히 드라마 제작 피디를 했다. 가장 잘 나가는 곳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품에 매번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괜히 내가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그러나 3년 정도 지났을 즈음, W가 갑자기 은퇴 선언을 했다.


"언니, 나 이 바닥을 떠나야겠어."


그녀와 나는 가끔씩 만나 막연한 미래를 막막해하며 서로의 신세를 애틋하게 한탄했었다. 우리는 30대가 되도록 주변의 친구들처럼 안정적으로 나이 들지 못했고 아직도 영화니 드라마니 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며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려운 연봉을 받고 있는 '방구석에서 기타 치는 한심한 삼촌'같은 상태였다. 나는 일만 할 수 있다면 돈 따위 어떻게 받아도 상관없는 사람이어서 이력서에 이걸 적어도 되나, 싶은 연봉을 받으면서도 즐겁게 일했다. 커리어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냥 그 순간 재밌어 보이는 일을 좇으며 계획 없이 나를 키웠다. 한 회사에, 한 분야에 오래 있으면 하나의 고민을 깊게 할 텐데, 나는 때마다 직업도 직종도 바꿔버리는 바람에 고민이 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막막하게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든다.


W는 나와 다르게 제작 피디 일만 계속했고 이쪽 업계에 완전히 질려버려서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며 긴 준비를 하더니 훌쩍 외국으로 떠났다. 그녀의 고민은 깊어질 시간이 충분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캐나다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다. W를 만나러 간다. 그녀가 캐나다로 떠나는 날이 정해졌을 때, 내년 여름이 되면 여름휴가를 내서 캐나다에 한 번 가겠다, 휴가가 안 되면 퇴사를 해서 퇴직금을 받아서라도 가겠다,라고 입방정을 떨었는데 우연하게도 정말 퇴사를 하게 되어버리는 바람에 캐나다에 간다. 영화나 볼까 스크린을 꾹꾹 눌러보는데 그녀와 내가 만나게 된 작품의 감독, 그 사람의 신작이 올라와 있다. 나쁜 사람 망하는 얘기는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 대한항공, 미워.


한국에서 캐나다까지 비행기 티켓값이 180만 원이다. 그중 만 원이라도 챙겨볼까 싶어서 아직 보지 못한 최신 영화를 틀었다. <탑건: 매버릭>은 아이맥스나 4D로 봐야 진짜라는데 아니, 탑건은 비행기에서 봐야 진짜지, 비행기 소음이며 기체 떨림이며 완전 실감 나는데, 라는 인스타 글을 올리고 싶어서 일부러 보는데 집중이 안 된다. 기체는 자꾸만 떨리고 그때마다 기내 방송을 듣느라 영화가 끊긴다. 캐나다로 가는 9시간 동안 하려고 디즈니 플러스에 영화 하나, 드라마 3개 각각 한 시즌씩, 애니메이션 단편도 싹 다운로드하여 놨는데, 내 깊은 곳에 묻어둔 영어의 기억을 꺼낼 수 있게 영어 회화 책도 사 왔는데 그 어느 것에도 집중이 안 된다. 혹시라도 저번에 프랑스에 한 달 머물렀을 때처럼 길게 여행을 떠나면 이번에도 글을 써야 할까 봐, 캐나다에 머무는 기간도 일부러 4주가 아닌 3주로 잡았는데도 자꾸만 이 여행에서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든다.


압박감 이 나쁜 놈, 결국은 내가 글을 쓰게 만드는구나.


캐나다는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다. W를 너무 보고 싶긴 했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다음 달에 잠깐 한국에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러니 그녀 때문에 간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여행이 버겁고 두렵다. 그런데도 비행기 안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여행이 필요했다. 자의로 포장된 타의로 회사를 퇴사하고, 다시 또 초라해져서 떠난다. 나는 여행이 무서운데도 불행할 땐 어김없이 여행을 꺼낸다.


캐나다에서도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이번엔 아주 형편없는 글을 써야지. 그렇게 작정하고 써버려야지. 개소리만 잔뜩 써서 이 사람 술 취했나? 싶을 때쯤 그 글들을 모아 1시간짜리 스탠딩 코미디 대본을 써야지. 영화 시나리오도 써야지. 넷플릭스 10부작 코미디 시트콤도 써야지. 도망치는 사람들에 관한 인터뷰집도 써야지. W를 만나면 같이 영상도 찍고, 편집도 하고, 세상이 신기한 25살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녀야지.


캐나다는 땅이 넓으니까 뛰기 좋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쓴 글로 여행에 관한 책을 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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