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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주성 May 31. 2020

카인의 징표를 가진 사람

신화적,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본 <퍼스트 리폼드> (2017)

 <퍼스트 리폼드>에 등장하는 에드먼드 바크는 성경 속 카인을 떠오르게 한다. 카인은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사람이므로 에드먼드를 카인으로 칭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에드먼드가 지역의 모든 환경오염을 일으킨 사람은 아니라 할지라도, 에드먼드는 분명 지역의 환경오염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톨러 목사는 바크 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한 뒤 에드먼드에게 책임을 묻지만, 그는 오히려 톨러 목사에게 신의 뜻을 알고 있는지 묻는다. 이 대목에서도 아벨을 살해하고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하고 물었던 카인과 같은 선상에 에드먼드를 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는 에드먼드의 뻔뻔한 태도는 자꾸만 카인을 떠오르게 한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신은 인간에게 카인을 심판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에덴에서 쫓겨난 뒤의 삶을 걱정하는 카인에게 신은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창세 4, 15) 라는 말로 남은 삶을 보장하는 동시에 단죄를 유예한다. 죄를 단죄할 권한은 신에게만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교리의 핵심 사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회개의 가능성 역시 인간에게 죄를 물을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퍼스트 리폼드>의 문제의식이 출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만일 환경파괴로 인해 인류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단죄할 수 없는 것일까?’ 종교가 이야기하는 내세에서의 심판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하고 있는 환경파괴에 대해 어떤 답을 줄 수 있는가?


 이 글을 통해 살펴볼 지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환경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점을 살펴볼 것이다. 극중에서도 언급되는 요한 묵시록의 구절을 참고하고, 그리스도교는 신의 피조물에 대한 의무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또한 그러한 규범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교황들의 담화문을 인용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환경문제를 배타적으로 언급한 이후 그리스도교는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왔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출 이후 환경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여 왔는데, 그의 담화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영화의 문제의식을 조명할 것이다. 톨러 목사가 퍼스트 리폼드 교회에 걸어두었던 ‘신은 우리를 용서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영화의 문제의식을 집약하고 있다. 톨러 목사의 그러한 물음은 기본적으로 환경을 파괴하는 바크에 대한 경고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괴로움이 드러나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처럼 환경에 대한 조치는 시급함에도 종교의 태도는 이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감독의 문제의식은 결말부의 성전 재봉헌식 시퀀스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이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감독의 문제의식을 파악할 것이다.


 끝으로 나날이 심각해지는 환경문제에 대해 종교는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것이다. ‘카인의 징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있다는 모순에 종교는 답을 줄 수 있을 것인지, 또한 현재의 환경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인지 알아볼 것이다.



환경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점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신의 피조물로 여긴다. 신의 창조 과정이 담긴 창세기는 신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일주일에 창조하였다고 기록한다. 또한 신은 ‘사람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 1, 26)는 말로 인간에게 모든 생명체를 다스릴 권한을 주었다. 이어 인간을 에덴동산의 관리자로 세워 그곳을 일구고 돌볼 의무를 부여한다.(창세 2, 15)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학자들은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자연착취를 정당화했다고 비판한다. 특히 앞서 언급된 구절은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우월하며 자연은 인간에게 종속되어있다는 생각을 정당화 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환경파괴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미국의 미생물학자인 르네 듀보는 생태계 위기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불충분한 지식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고, 환경파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책임을 절대화시킬 수는 없다는 입장을 드러낸다. 그 증거로 그리스도교 이전의 시기와 그리스도교의 영향권 바깥에서 발생한 자연파괴를 제시한다. 또한 학자들은 창세기 1장의 ‘지배명령’을 기반으로 한 그리스도교 비판은 잘못된 해석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지리학 교수인 로빈 도티에 따르면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는 인간을 종신 소작인으로 묘사할 뿐, 생명의 주인으로 설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를 둘러싼 비판은 그리스도교 내 생태신학의 태동과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자연과 상호 불가분의 관계로 설정한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라’(창세 3, 7)는 구절이 대표적으로 이를 보여준다. 또한 극중 언급되는 요한 계시록에서는 인간의 범죄로 인해 자연환경이 받게 되는 고통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 8장은 천사들이 일곱 번의 나팔을 부는 것으로 인간에 대한 심판이 시작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땅과 바다와 하늘이 불타 인간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며, 신에게 선택받지 못한 인간들을 동물들이 공격한다는 것이 심판의 내용이다. 톨러 목사는 자신의 목소리로 요한 계시록 11장 16절을 암송하는데, 그 내용은 심판 과정에서 땅을 파괴한 인간을 파멸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는 환경 파괴를 죄악시하고 있으며, 인간이 환경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환경 문제가 그리스도교를 통해, 특히 그리스도교의 수장인 교황을 통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이다. 특히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0년 담화문을 통해 자원의 고갈과 자연 환경의 파괴로 인한 위기의식의 확대와 이에 따른 생태학적 각성을 촉구한다. 교황은 ‘신이 보기에 좋았던’ 태초의 세계는 인간의 범죄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오늘날의 환경위기를 심각한 도덕적 위기의 난국으로 규정한다. 더불어 과학기술의 무차별 적용과 생명 존중의 결여로 인해 일어난 도덕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 인류가 생명의 존중은 곧 모든 피조물의 보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3년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환경보호를 특히 강조하는 교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환경 문제를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성찰한 회칙(「찬미받으소서」)을 집필할 정도로 환경 보전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2019년 10월 아마존에서 열린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한 교황은 ‘생태에 대한 죄악’을 새롭게 정의한 바 있다. 생태에 대한 죄악은 신, 이웃, 공동체 그리고 환경에 반하는 작위적 또는 부작위적 행동으로서, 환경을 오염시키거나 파괴하는 습관이나 행동을 말한다. 교황은 나아가 생태에 대한 죄악을 가톨릭 교리에 추가하는 방안을 비중 있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환경보호에 관련된 교황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리스도교 내에서 환경 문제에 대한 성찰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간중심적 사상은 여전히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교가 환경의 보전을 도덕적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신은 우리를 용서할 것인가?

 톨러 목사의 부임지인 퍼스트 리폼드 교회는 노예해방운동과 남북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공간이다. 불의에 맞서 행동했던 교회의 역사는 톨러 목사로 하여금 환경문제에 맞서 행동할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관광지로 전락한 교회의 현실은 톨러 목사로 하여금 행동에 나서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또한 퍼스트 리폼드 교회는 보전의 대상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인간이 바라보는 자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일을 벌이듯, 퍼스트 리폼드 교회는 톨러 목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관리되고 있다. 물이 새는 화장실과 고장이 난 오르간은,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톨러 목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외부 인력에 의해 수리된다. 풍성한 삶 교회와 바크 산업이 퍼스트 리폼드 교회에 뻗는 손길은 톨러 목사가 행동에 나서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톨러 목사는 그들이 진정 퍼스트 리폼드 교회를 위하여 그러한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퍼스트 리폼드 교회를 자연에 비유하는 것은 교회의 관리인이 쓰레기를 버리는 시퀀스에서 두드러진다. 교회 마당에 위치한 양철 쓰레기통에는 교회의 이름인 ‘퍼스트 리폼드’가 크게 적혀있다. 이 장면은 관리인이 쓰레기에서 빈 술병들을 발견하고 톨러 목사의 건강 상태를 의심한다는 사건의 인과에 있어 필요한 장면이다. 동시에 ‘퍼스트 리폼드’ 쓰레기통은 그 시퀀스에 앞서 제시된 ‘뱃속이 쓰레기로 가득한 새’의 사진을 재현하면서, 자연을 쓰레기통으로 전락시킨 인간을 고발한다.


 퍼스트 리폼드 교회가 자연을 상징한다면 그곳을 관리하는 톨러 목사는 자연을 실체화한 인물이다. 톨러 목사가 마이클의 죽음 이후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 이전에, 암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톨러 목사의 신체는 그 자체로 파괴된 자연의 상태를 보여준다. 환경 파괴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마이클의 말은, 갈수록 망가져가는 톨러 목사의 신체로 실체를 얻는다. 톨러 목사를 자연으로 이해하면 톨러 목사와 메리의 결합은 자연과 인간의 결합으로 설명된다.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이 유영하는 공간은 그들의 인식 범위를 벗어난다. 자연을 표상하는 톨러 목사는 지역 차원의 환경 문제에 머무르지 않으며, 자연을 위하는 메리 역시 지역 차원의 환경 문제를 넘어선다. 공간을 초월하는 두 사람의 유영은 환경 파괴를 일삼으면서도 지역의 환경에만 관심을 갖는 바크 산업과 대조를 이룬다.


 주인공인 톨러 목사의 괴로움은 환경 문제를 일으키는 에드먼드를 심판할 수 없다는 무력함에서 나온다. 에드먼드가 지역의 환경파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톨러 목사의 목소리는 에드먼드에 의해, 대형 교회의 목사에 의해 묵살 당한다. 톨러 목사 역시도 자신을 찾아온 마이클이 자살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이 에드먼드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남기는 것이 유일하지만, 톨러 목사는 그러한 일이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톨러 목사가 자살 폭탄 테러를 준비하는 것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톨러 목사가 암송한 요한 묵시록의 실현이다. 혹은 앞서의 관점을 반영하여 자연이 인간에게 내리는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느 관점으로 보더라도 톨러 목사의 결단은 신의 뜻이 아닌 톨러 목사의 의지다. 자신을 희생해 인류를 구원한다는 계획을 그대로 따랐던 성경 속 절대자의 모습과는 대비를 이룬다. 폭탄 테러 계획이 변했다는 사실은 톨러 목사의 계획에 신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부정한다. 또한 자신의 몸을 철조망으로 감싸는 톨러 목사의 표정에서는 기적의 실현이 아닌 고통만이 느껴질 뿐이다.


 ‘신이 에드먼드를 비롯한 죄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간적 심판인 테러는, 메리의 존재로 인해 자연과 인간의 결합으로 변모한다. 영화는 철조망을 두른 톨러 목사를 껴안는 메리를 통해 고통스러워하는 자연과 이에 공감하는 인간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또한 심판의 대상이었던 인간들에게 삶을 보장함으로써 단죄를 유예한다는 신의 뜻을 재현한다. 현실에서 카인을 심판하고자 했던 톨러 목사는 끝내 종교의 근본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메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질 심판을 막았다는 사실은,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관심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신이 우리를 용서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톨러 목사의 테러 계획을 유일하게 아는 존재인 관객에게 던져진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감독은 결말부에서 톨러 목사가 내린 결정을 비난하지 않는다. 감독은 오히려 ‘풍성한 삶 교회’로 대표되는 종교를 비판한다. 바크 산업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풍성한 삶 교회는 자본에 잠식되어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착취하는 일에 앞장선다. 이는 에드먼드를 단죄하고 싶지만 방법이 없어 고뇌하는 톨러 목사의 모습과 대조된다. 내세에서의 단죄를 이야기하고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경고할 의무가 있는 교회는, 현실에 머무를 뿐만 아니라 환경 파괴에 눈을 감고 있다.


 신만이 인간을 단죄할 수 있다는 교리는 불의를 보며 괴로워하는 인간에게 무력감을 안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은 자연과 진정으로 자연을 위하는 사람만을 해칠 뿐이다. 재봉헌식 당일 톨러 목사를 찾기 위해 그의 방을 찾아간 제퍼스 목사는 문 앞을 서성일 뿐 행동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톨러 목사와 메리를 구할 수 없었다. 감독은 문 앞을 찾아가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신의 피조물인 환경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교회는 환경 파괴에 맞서 행동할 것이 요구된다.


 교회의 침묵은 불의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야기할 뿐 아니라, 카인의 징표를 가진 사람들에게 내세의 심판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도 일으키지 못한다. 성경에서 카인에게 징표를 부여한 것은 신이지만, 징표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이다. 이때 교회는 신의 뜻을 해석하고 인간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카인의 징표가 예정된 단죄가 아닌 강함이나 성공을 의미한다면, 이는 교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징표가 된다.


 교회가 환경 파괴를 죄악으로 인식하고 신자들에게 환경을 보호할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톨러 목사의 편에 서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종교가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하더라도, 교회는 행동에 나섬으로써 불의를 보며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 종교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감독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개인의 고뇌를 확장하여 보여준다. 또한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개인들은 영화라는 통로를 통해 서로 연대한다. 그리고 <퍼스트 리폼드>와 톨러 목사는 기꺼이 관객들에게 그 품을 내어주고 있다.


사진 출처 - imdb.com

참고 문헌

가톨릭 교리서 제2편 제2부 제2장 제4절 1441, 1442조

유경촌, 생태계위기에 대한 그리스도교 책임논쟁 소고, 2003, 가톨릭신학.

          , 교회 문헌에 나타난 환경 인식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회 문헌에 대한 윤리신학적 성찰

현혜란, 가톨릭 교리에 ‘생태에 대한 죄악’ 신설 추진된다, 2019.11.16.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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