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aptonic May 04. 2020

쿼런틴 인 시애틀

Stay Home Save Lives......

시카고에 교환학생으로 온 친구가 잔뜩 기대감을 품고 시애틀에 온 당일, 도시가 락다운이 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 다른 친구와 근처의 바다에 가서 오래간만에 풍경을 즐기고, 펑키한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여유를 만끽하다 홈스테이 중인 집에 가서 집주인 분과 함께 실컷 대화를 나누고 노을을 감상하고 돌아온 날에 발표된 소식이라 더욱 당황스러웠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할 즈음이어서 이미 재택근무 중이었고, 밖에 나가기에 좋은 때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도시가 닫힐 줄이야.


Alki Beach


한국이 한창 심각할 때 어느 정도로 폐쇄적으로 기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심각했다. 밖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레스토랑과 카페, 바 들에선 오로지 테이크아웃만 가능했고, 영화관이나 노래방 등등 소위 entertainment를 즐길 수 있는 시설들은 모조리 문을 닫았다. 미용실 같은 곳들도 당연히 문을 닫고, 단순히 말하자면 마트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친구가 도착한 날 밤이 하필이면 이 명령이 처음으로 발표된 날이라 친구는 고생 끝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나와 함께 마트에 가야 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패닉 해서 마트를 털어버리면 우리도 먹을 게 없으니까. 1주일 동안 먹을 것을 비축하기 위해 조금 긴장하며 간 마트는 사실 생각보다는 긴장감이 덜 했다. 어차피 점심시간이 30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대단한 걸 요리하긴 힘들어서 샌드위치 용 빵, 터키 브레스트, 계란, 시리얼, 샐러드 야채, 토마토 등등 간편한 식재료들과 요구르트 같은 것들을 사서 들어왔다. 점심이야 가볍게 때운다고 쳐도 시카고에서 친구가 놀러 왔는데 너무 이런 것들만 대접하긴 미안하니 저녁은 여러 식당들에서 시켜먹을 계획이었다. 


친구가 놀러 온 동안의 루틴은 대략 이랬다. 재택근무 동안에는 모두가 아침 8시에서 저녁 4시 30분까지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친구가 잘 때 나는 일어나서 베드 테이블 위에 근무용 노트북을 올리고 차 한잔을 끓여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 친구가 일어나면 좀 더 편히 근무하기 위해 친구를 위 층으로 올려 보낸다. 그래도 비행기 몇 시간을 타고 왔는데 아무 데도 못 가면 좀 슬프니 시애틀에서 구경할만한 공원이나 랜드마크 몇 군데를 알려주면 친구가 알아서 준비해서 나갔다 온다. 그 사이 내 근무가 끝나고 친구가 돌아오면 저녁을 먹고 드라마를 본다든지 근처를 산책한다든지 하며 시간을 보낸다. 


친구가 왔을 때가 딱 벚꽃이 만개할 시즌이어서 비교적 사람이 적은 평일 저녁에 벚꽃 구경이나 할 겸 우리 대학의 캠퍼스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평일이어도 대학가와 캠퍼스 내부가 바닥에 떨어진 벚꽃들 만큼이나 다닥다닥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겠지만 다행히 사진들을 찍으면서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할 정도로 사람들이 없었다. 사람을 내 카메라로 찍어주는 게 얼마만인지. 찍힐지 말지 고민하는 친구에게 강경하게 여기까지 와서 사진 한 장 안 찍힐 거냐고 밀어붙여 여러 장 찍어주었다. 막상 카메라를 들이대니 나보다 포즈를 잘 취하더라. 그날 밤 애인에게 사진을 야심 차게 보냈는데 별 반응 없냐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푸념을 한참 들어주었던 것은 덤이다.


University of Washington


떠나기 전 날에는 친구가 제육볶음과 닭곰탕을 해주었다. 잠도 재워주고 이곳저곳 잘 데려다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며 내가 일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고 완성된 요리들은 친구가 자부심을 가질 만큼 맛있었다. 사실 그때 이후로 난 집에서 그만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만든 적이 없다. 시간적 여유는 있어도 기력이 없다. 제일 정성 들여 만들었던 게 아마 참치 계란볶음밥이었나. 나는 음식보다는 음료에 더 정성을 기울이는 편이다. 혼자 방에서 잎차를 끓여 빈티지 찻잔에 담아 디저트를 곁들이는 시간이 밥을 먹는 시간보다 행복하다. 쿼런틴이 시작되기 직전에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의 앤티크 가게에서 사 온 찻잔과 소품들이 예쁜 사진을 찍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5에 구매한 찻잔과 받침!


락다운이 시작되고 나면 돈을 좀 덜 쓰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나는 밖에 나가야 기력이 회복되는 사람이라 밖에서 카페를 간다든지 새로운 동네를 탐색한다든지 하며 한참을 돌아다니며 돈을 쓰다가도 방 안에서는 노트북이나 붙잡고 멍하니 누워있는 시간이 더 긴데, 집 안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 쌓이는 스트레스를 뭔가 먹고 구매하는데 쓸 수밖에 없다. 


방에서 즐기는 커피와 디저트들. 어쩌다 보니 두 사진 다 엔시티127의 쟈니가 들어있다.


거진 3주를 침대에 기대서 일을 하다 보니 점점 더 허리가 아파오는 게 느껴져 적당한 사이즈의 의자와 책상을 구매했고, 하루 종일 건조한 방에 있으니 목 상태가 점점 안 좋아져 (무려 조명이 나오는) 가습기를 구매했다. 예전에 쓰던 커피포트가 너무 낡아 새 커피포트를 구매했고, 위층에서 생활하는 집주인이 최대한 서로 거리를 두자며 암묵적으로 위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금지하는 바람에 일회용 식기들을 잔뜩 구매했다. 음식을 해 먹기가 힘든데 근처에 연 식당도 별로 없으니 자연스레 배달음식을 자주 시켜먹게 되어 식비가 오히려 증가했다. 아, 그리고 거진 3년간 모아 온 스티커들을 쓰기 위해 다이어리를 하나 구매했다. 내가 원하는 문구를 박을 수 있는 가죽 일기장인데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해 신중하게 고른 결과 다이어리 자체는 맘에 드는 디자인으로 배송받았는데 문제는 가죽 냄새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다. 한 1주일 정도 놔둔 결과 다행히 냄새가 꽤나 빠져서 한 장 정도를 야심 차게 스티커 여러 장을 붙여가며 채우고 아직까지 더 쓰지 않고 있다. 


JCC가 무엇의 약자인지 설명하긴 조금 부끄럽다.


원래대로라면 글을 쓰는 지금 시점으로 내일 시애틀의 Stay At Home Order이 풀려야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미국 곳곳에선 이런 Order에 대한 반대 시위들을 하며 오히려 규제가 풀리는데 악영향을 끼치고 있고,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 남아있는 이상 완벽히 안전하게 여기저기 다니기까지는 몇 달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태 초반에는 마스크고 뭐고 신경 안 쓰고 다니던 사람들이 이제는 (백인들 마저!)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는 것이다. 조심하는 비율이 높아질수록 호전되는 시기도 빨라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람들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낙관적이지는 않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종차별은 아직까지는 겪어본 적이 없다. 시애틀이 원래 이런 면에서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낫긴 해서 그렇지 않나 싶다. 내가 지나가면 옆으로 피하거나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그런 사람들의 100%가 마스크를 끼지 않은 백인이라는 점이 좀 웃기긴 하다. 아디다스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장 보고 돌아가는 길에 마스크를 낀 내 사진을 찍어간 사람이 있는데 (역시 마스크를 끼지 않은 백인이다.), 어디에 쓰였을지 궁금하다. 어디에 쓸 건지 물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


암만 최선을 다해도 일상에서의 제약이 너무 크기 때문에 아무래도 삶이 무료해질 수밖에 없는데, 넷플릭스와 독서, 음악 감상 등등 조금은 뻔한 시간 때우기 용 활동 이외에 최근에 다시 시작한 것이 플루트 연주이다. 작년 이맘때엔 관악 밴드에 속해있어 한창 다음 달에 있을 연주회를 준비하느라 바빴는데 직장인이 되고 나니 달리 소속된 단체도 없어 한동안 소홀해 있다가 오랜만에 다시 플루트를 꺼내 들었다. 거진 반년을 혼자 뒀다 보니 역시나 길들여지지 않은 소리가 반항하듯 튀어나왔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연주하려고 노력 중인데 부디 예전 같은 소리가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원래는 캐나다에 사는 친구와 같이 행아웃을 통해 합주를 하기로 했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한 3주 전을 마지막으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다시 연락해야겠다. 


쿼런틴에게 감사한 건 원래 헬스장 안에서 하던 운동을 밖에서 하게 되며 내가 사는 곳 주변을 더 탐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러닝머신 위에서만 열심히 움직이던 다리로 동네를 누비게 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 가장 재미있는 것은 내가 사는 곳에서 내 대학까지 달려서 딱 25분 정도가 걸린다는 것이다.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리니 대충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긴 하지만, 실제로 뛰어서 도착했을 때의 기분은 남다르다. 그리고 밤 8시 넘어서 뛰면 가끔씩 동네 고양이를 볼 수 있다. 워낙에 애교가 많은 친구라서 멈추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계속해서 뛰었는데 그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뼈 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그리고 내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공원 하나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헬스장을 다니면서 간간히 지나쳤던 곳에 있어서 오히려 이곳에 산지 9개월 정도가 된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동네에 있는 장소 치고는 생각보다 뷰도 괜찮다. 시애틀의 랜드마크들이 언덕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고, 밤이 되면 나름 운치 있는 야경을 빼꼼 내다보듯 감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 탁 트인 공원이라 노을이 질 때 펼쳐지는 광경이 웅장한데, 고양이도 포기하고 달렸던 내가 달리기를 멈추고 사진을 홀린 듯이 찍었을 정도였다. 하늘에 걸쳐진 담요 같이 펼쳐진 구름과 지면 사이에 진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노을이 여전히 기억난다. 

 

나름대로 작고 예쁜 공원


 신기한 건 오히려 이렇게 모두가 집에 있게 되자 전화가 걸려오는 빈도수가 급감했다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아침부터 적어도 n분에 한 번 씩 콜이 들어와야 할 텐데 아침엔 거의 3~40분에 한 번 씩 콜이 들어올까 말까 하고 오후로 접어들면서 콜이 들어오는 빈도수가 잦아진다고 해도 대기 시간이 10분을 넘어가지 않는다. 이전에 길게는 3~40분까지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전화를 받자마자 짜증 섞인 말투가 들려오던 것 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사람들에게 여유가 생기니 전화를 받기도 편해졌다. 이전에는 하루에 적어도 한 번 씩은 번아웃이 오게 만드는 힘든 콜들이 들어왔었는데 요즘은 아예 없지는 않아도 전보다 그 빈도수가 훨씬 적다. 하나 기억에 남는 콜이 있다면, 전화를 받기 시작하자마자 차이니즈 바이러스 운운하던 사람과의 콜이다. 시작부터 뭔가 싸하다 하더니 역시나, 진상이었다. 


당신은 에이전시에 속한 사람이니 저희보다는 이 번호에 연락을 하시는 편이 - 아니, 내가 지금 당신에게 전화했잖아. 난 다른 사람한테 전화하지 않을 거야. 


저희가 보험 기간 연장을 해드리고 있으니 그래도 혹시 모르시면 신청하시는 편이 - 아니, 난 그딴 멍청한 보험 기간 연장 따위 신청하지 않을 거야. 시간 낭비라고. 


좋은 소식이라 한다면, 이렇게 재택근무를 하는 사이에 수습기간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보통은 세 가지 트레이닝을 받아야 통과할 수 있는 수습기간이지만 시기가 시기이니 만큼 이런 결정을 내린 듯하다. 나야 좋지. 콜을 받을 때의 자신감이 상승한 기분이다. 콜을 받을 때의 말 속도라든가, 고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든가, 등등 여전히 연습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우선 걱정거리가 하나 사라지고 나니 좀 더 편하게 자기 계발을 하게 된다.


나름대로의 Work Station


슬슬 재택근무에도 익숙해진 참이고, 한정된 상황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시애틀에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역시 출근이 그립고, 카페에서 글을 쓰던 때가 그립다. 다행인 건 슬슬 카페도 테이크 아웃 한정으로 운영을 하고 있고 집 근처의 예쁜 디저트 가게도 열었다는 것일까. 이번 달부터 점진적으로 Stay At Home Order도 해제한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한시바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작가의 이전글  미국에서의 첫 사무직: 콜센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