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ice (18.01.25 ~ 18.01.26)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수평선 너머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새로운 불꽃을 피우며 태양이 솟는다. 그 따사한 온기가 객실 내부를 비추며 잠든 이를 간질인다. 희미하게 뜬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기차는 어느새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신기한 광경에 절로 잠이 달아난다. 이런 감정이 나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직도 어색한 표정으로 수줍게 인사하며 건너편 침대에서 깨어난 그녀 역시 나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지난 새벽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며 알 수 없는 미묘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분명한 건 간단히 설명하기에는 뭔가 많은 요소들이 개입된 그런 만남이었다.
새벽 두 시 언저리에 출발하는 야간열차를 기다리며 잘츠부르크 중앙역 대합실에서 한없이 대기 중이었다. 함께 기다리는 거구의 타국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캄캄한 밤을 달려 베네치아에 도착할 기차 객실은 가격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었다. 가장 저렴한 6인실부터 독실까지. 가진 자금은 넉넉지 않았지만 6인실은 3층의 침대 사이 공간이 협소하다고 하기에 조금 더 보탠 64유로(한화 약 85,000원 정도)에 4인실을 예약한 상태였다. 남녀 구분 없이 처음 보는 이들과 섞여 사용하는 공간이기에 다양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도난 위험도 크다고 해서 이날 하루를 위해 많은 후기에서 추천한 자전거 자물쇠까지 챙겨 왔다. 함부로 남을 의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도 쉽게 믿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터진 트러블. 문제는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난다. 폭풍과 보조배터리 이후로 한동안 조용했던 장난꾸러기 여행의 신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걸까? 검표원은 내가 당당히 내민 티켓이라고 생각한 프린트물을 빤히 쳐다보더니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황한 내가 맞는 게 아닌가 하고 재차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티켓이 아니라는 말이 다였다. 순간 넋이 나가 얼빠진 표정을 하고 온갖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떠올린 것 같다. 여기서 꼼짝없이 발이 묶인 나는 이후 예약해둔 일련의 교통수단들이 순서대로 밀리면서 모든 일정이 다 틀어지고 그러다가 귀국도 못하고 국제미아가 되어 낯선 타지를 방황하는데…….
부정적인 상상의 늪에 빠진 날 구원한 건 검표원의 말 한마디였다. 내가 티켓인 줄 알고 프린트해간 예약 확인서 말고 다른 파일을 받은 게 있는지 이메일을 확인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느려 터진 유럽의 인터넷을 붙들고 한참을 씨름한 끝에 QR코드가 박힌 PDF 파일로 된 탑승권을 찾을 수 있었다. 방긋 웃으며 열차로 들어가라는 손짓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칠칠치 못한 스스로를 타박했고 그렇게 안내받은 객실 문을 열어 당기는데. '철컹!' 이건 또 뭐지? 문이 열리지 않도록 안에서 굳건히 잠긴 자물쇠를 보면서 또 한 번 벙찐 나였다. 그와 동시에 안쪽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다급한 움직임이 끝나자 잠긴 문이 열렸고 그렇게 그녀와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피자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의 4대 도시 중 하나, 베네치아에서 혼자라면 조금은 뻘쭘했을 피맥을 그녀와 함께 즐길 수 있었다. 한 달 동안의 유럽여행 중 첫 2주는 남자 친구와 동행하고 남은 2주를 각자가 원하는 코스로 따로 여행 중이라는 그녀는 마침 이곳으로 오기 전에 나름 알아주는 유튜버인 내 대학 후배를 숙소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했다. 그 덕에 같은 유럽에 있는 줄도 몰랐던 후배와도 연락을 주고받았고 한국에 돌아가면 셋이 다 같이 만나 밥 한 끼 하자는 기약 없는 약속도 잡았다. 밤은 깊었고 소화도 시킬 겸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까지 걸었던 우리는 야경을 보러 몰린 인파 사이에서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무수히 많은 수로를 따라 구획이 나뉘고 다시 그 사이를 잇는 다리들로 연결된 베네치아는 듣던 대로 물의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은 독특한 공간이었다. 고인 바닷물이 풍기는 갯내음으로 가득 찬 이 도시에서는 자동차가 다니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흔히 보는 바퀴 달린 버스가 아니라 배 형태의 수상버스인 바포레토(Vaporetto)가 곳곳을 이어주는 발이 되었다. 하루짜리 교통권을 끊으면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 바포레토의 가장 큰 장점은 처음 출발한 선착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순환 루트로 운영된다는 점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 야밤에 올라탄 바포레토는 막차시간까지 원 없이 즐길 수 있는 유람선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버스는 출발했고 나는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에 내려서 맞이한 이탈리아의 아침을 걸으며 도시의 품에 안겼다. 그녀와 저녁 약속을 정한 뒤 잠시 헤어졌고 울퉁불퉁한 돌길에 행여나 바퀴가 망가질까 노심초사하며 캐리어를 끌었다. 독특한 이탈리아의 발음으로 내 성을 부르던 안내데스크의 노신사분께 묵직한 무게의 열쇠를 받아 들고 올라간 호텔방은 곤돌라(Gondola)가 지나다니는 수로가 창 밖으로 한눈에 보이는 뷰였다. 깊게 잠들지 못한 야간열차에서의 밤을 보상하듯 잠시 눈을 붙인 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 곤돌라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를 누비는 중이었다. 가수 아이유의 「하루 끝」 뮤직비디오에 나온 알록달록한 집들이 늘어선 부라노(Burano) 섬에도 들렀다가 산 마르코 광장 종탑에 올라 베네치아 전체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하루 끝'의 노을을 마주 보았다. 물론 이탈리아 여행은 이제부터가 그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