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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Feb 18. 2021

인생에서 쓸모없는 단어들

마약 같은 단어들이 있다. 힘들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밑천을 드러내기 싫을 때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마약의 속성이 치료제가 아니라 진통제인 것처럼, 그 단어들은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만 사용하게 되고,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든다. 과거에는 이런 마약 같은 단어들에 나도 모르게 중독되어 자주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단어들이 내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단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단어들에 대한 이야기다.




1. 어차피


'어차피'는 일이 잘 안 풀렸을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어차피 안 될 거였어." 말하면서 뼈아픈 실패를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치부한다. 하지만 '어차피'는 매우 위험한 단어다. 나의 과거를 전부 부정하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안될 줄 알았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지, 왜 나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단 말인가. 실패자의 입에서 나오는 '어차피'는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실패의 이유를 찾고 다음에는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어차피'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는 '어차피'도 나쁘긴 마찬가지다. "너는 어차피 뭘 해도 안 될 거야."라는 말은 상대방의 미래를 전부 부정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정말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타인에 대해서 '어차피'를 쓰는 것은 대단한 실례이다.


2. 원래


'원래'는 주로 다른 사람과의 갈등에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을 때 튀어나온다. "그 사람 원래 이상한 사람이잖아."라고 말하면, 나는 정상인데 이상한 그 사람 때문에 불필요한 갈등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원래 이상한 사람인 걸 진작 알고 있었으면 그에 맞는 대처를 했어야지, 왜 알고 있던 사실을 활용하지 못해 갈등을 만든단 말인가. 일이 터지고 나서 운운하는 '원래'는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단어일 뿐이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양쪽 모두 책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원래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토론이나 협상을 통해 풀어나가야 한다.


어설프게 일반화할 때 사용하는 '원래'도 좋지 않다. 주로 꼰대들이 많이 사용한다. "이거는 원래 1학년들이 하는 거야.", "내가 살아보니까 인간관계라는 게 원래 그렇더라." 빈약한 논리를 보충하기 위해 사용되는 '원래'는 상하관계와 결합되어 불합리를 합리화시키곤 한다. 나보다 낮은 사람, 만만한 사람에게 '원래'를 사용하지 않도록 더 주의해야 한다.


3. 만약


'만약'은 미래에 대한 가정을 담고 있는 단어지만, 과거의 일에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에 사용하는 '만약'은 썩 좋지 않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그 주식을 샀었다면 부자가 됐을 텐데.", "만약 네가 그때 이렇게 했다면 우리는 행복했을 거야." 이렇게 말했을 때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후회만 깊어지고, 인생이 허망하게 느껴질 뿐이다. 나의 선택이 미래에 어떻게 돌아올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만약'을 붙여가며 과거의 선택을 후회해 봐도 현재에서 달리지는 것은 없다. 


'만약' 중독을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어차피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면 된다. 그리고 후회가 아닌 예측에만 '만약'을 사용하기로 결심해보자.


4. 때문에


'때문에'는 앞에 어떤 것이 붙느냐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된다. 우선 앞에 다른 사람이 붙으면 무조건 나쁘다. "너 때문에 망했어.", "엄마 때문에 지각했잖아."처럼 다른 사람을 탓할 때 많이 쓰는데, 자신이 잘못해놓고 남을 탓하는 것은 당연히 나쁘다. 그리고 탓이 아니라 실제로 문제의 원인이 분명하더라도 '때문에'를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실례이다. 당사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더라도 타인에게 "너 때문에"를 듣게 되면 기분이 상할 수 있고, 당사자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 


또한, 문제의 원인이 한 사람에게만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때문에'는 위험하다. '때문에'는 모두가 잘못한 상황에서 약자를 원인으로 지목할 때나,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 타인의 잘못을 강하게 공격할 때 사용될 수 있다. 머릿속에 있는 '때문에'를 섣불리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어떤 심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다.


'때문에' 앞에 어떤 주변 요소가 들어가는 것은 한 번은 괜찮다. "고장 난 컴퓨터 때문에 망했어.", "폭설 때문에 지각했어." 같이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하여 문제가 생겼을 때, '때문에'를 사용할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이해해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같은 주변 요소에 대한 '때문에'를 여러 번 반복해서 사용한다면, 주변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때문에' 앞에 들어갔을 때 좋은 단어는 '나' 아니면 '저'뿐이다. 하지만 "나 때문에 잘 안 풀렸네. 미안해.", "저 때문입니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같은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진정으로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억지로 연기하려 해도 불가능하다. 신뢰 한 번 얻겠다고 문제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안을 사람은 없다.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만이 '때문에' 앞에 스스로를 붙인다.


5. 개인적


'개인적'이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상황 자체가 우스운 상황이다. 내가 누구의 대변인도 아니고,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나라는 개인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인데, 그럴 땐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 "개인적으로 나는 별로야." 같은 말이 자주 들린다. 의견은 내고 싶은데,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앞에 '개인적'을 붙이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견을 냈는데, 사람들이 동의를 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난다거나, 다수 사람들의 생각과 거리가 있어서 비난이 걱정되는 경우에 '개인적'이라는 단어로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 두게 된다.(가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의견의 수위를 낮추기 위해 '개인적'을 사용하는 사람은 논외다.)


'개인적'이라는 단어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의 생각과 의견이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가 감소하는 부작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개인적이라고 한정 지어 버린 말은 다른 이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남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 생각은 혼자만의 세계에 갇히기 쉽고, 의미 있는 사상으로 발전할 수 없다. '개인적'이라는 말 뒤에 숨고 싶은 생각일수록 과감하게 세상에 던져야 한다. 그래야 생각의 힘이 길러진다.




마약 같은 단어들, 인생에서 쓸모없는 단어들을 최대한 입 밖으로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항상 성공하지는 못한다. 뇌 속인지, 혀 속인지는 몰라도 어딘가에 깊게 각인된 단어들은 내가 방심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온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 단어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즉시 알아챈다. 알아채고 나면, 현재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가능성을 찾게 된다. '어차피 안될 거는 아니었지. 다음에는 잘해보자.', '원래 그런 사람이 어딨어. 내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거지.', '만약에는 개뿔, 지금부터 잘하자.', '누구 때문에? 나 때문, 무조건 나 때문!',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또 말해 버렸네. 자신감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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